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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Jul 07. 2021

여름이 오고 장마도 오고 그리고 나는

뭐해          


 아무렇게나 끄적이고 있는 나를 보며 누군가 내게 묻는다. 글쎄, 나도 내가 무얼 하는지 모른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남는 이면지에다 정말 아무렇게나 펜을 굴리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간간이 찾아오는 기쁨, 스치듯 가버리는 슬픔, 작은 분노와 고통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건 그저 선들의 어지러운 얽힘과 설킴들. 나는 열심히 얽히고설키는 중이다. 너무 열심히 해대다 보니 팔이 아파서 도저히 더 할 수가 없어 펜을 내려놓고 옆으로 수북이 쌓인 이면지들을 한데 모아 찢어 버린다. 그냥 버리지 않고 부러 여러 번 찢어 버리는 걸 보면 뭐가 담겨 있긴 있나 보다 하고 잠시 혼자 생각해본다.       

    

 우르르 쾅쾅 하늘을 때리는 천둥과 함께 가릴 것 없이 쏟아져 내리는 여름의 장마가 시작되면 나는 부풀 대로 부풀어 올라 곧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을 머릿속에 이고 다닌다. 여름과 장마는 내게 한 해의 반이 훌쩍 지났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신호와 같아서 겨우 반밖에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온몸에다 쏟아낸다. 쏟아내는 신호의 속도가 언제나 내 의지보다 빨라서 나는 늘 불안에 잠기고 늘 후회라는 감정에 지고 만다.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걷는 것 자체에 집중하기도 하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마음이 쏠려 잊기도 하고, 조금은 비어지는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웃음을 찾기도 하는데 걷기도 뛰기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여름과 장마는 힘내기를 위한 소소한 의식마저 내게서 빼앗아 가버리고 그야말로 나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무척 속상하다.           


보여          


 책상과 침대맡에 종이와 펜이 눈에 들어온다. 끄적이는 게 습관이자 취미라 저기에도 두고 여기에도 두는 게 종이와 펜이다. 종이에 아무렇게나 쓰고, 그리고, 덧칠하는, 흔히 낙서라고 부르는 이 행위가 여름과 장마에 대항할 수 있는 나의 최고 힐링템이다. 뛸 수도 걸을 수도 없을 때 살얼음 잔뜩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다 늘 굴러다니는 종이에 세트로 구르고 있는 펜을 들어 순서 없이 끄적인다. 규칙과 시선이 없는 움직임의 자유에 거침없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뱉어내고 토해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꺼내지 못한 욕망과 욕구를 또렷하게 꺼내어 보기도 하고 나조차도 지겨운 나의 슬픔을 알 수 없는 선들의 출렁임으로 위로하기도 하고 끝끝내 절망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모형과 도형들을 수도 없이 나열하기도 한다.          


노트북과 아이패드 맥북과 탭북까지       

    

 쓰고, 그리고 기록하고 저장할 수 있는 최신의 것들을 가지고 있고 쓸 수도 있지만, 저기와 거기엔 자유와 비밀이 없다. 앱과 플랫폼 안에서 줄과 열을 맞춰 움직이는 나는 그저 자판일 뿐이다. 나의 열 손가락도 배운 대로 습관대로 아래와 위, 종종 옆과 사선으로 깜빡이는 커서를 옮길 뿐이다. 시선의 온도는 차갑기만 하고 규칙과 순서엔 지친다. 그래서 나는 종이와 펜을 사 모으고 펼치고, 이곳저곳에 얹어놓고 쑤셔 놓는다.   

   

 장대비가 내리다 그쳤다가, 다시 우콰콰콰- 쏟아지는 오늘. 종이와 펜을 집어 들고 침대에 눕는다. <청소>와 <정리>라고 쓴다. 아마 뭐라도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나 보다. 나조차 해석 불가능한 선들을 마구잡이로 그리고 있다. 아니다. 너무나 확연하게 해석 가능이다. 저 선들은 아마 지금 이대로라면 어쩌면 영원히 그대로 일거라는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경고이자 응원이자 위로다. 내일은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종이와 펜들이 넉넉하게 잘 널브러져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본다. 어김없이 여름이 오고 장마도 왔다. 그리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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