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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Mar 11. 2022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삼월인데 춥다.      


발목엔 아직도 하얗게 버짐이 피어있다. 욕실에 세숫대야라고 부르는 대야가 있는데, 언제부터 그 대야를 세숫대야라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한번도 세수를 한 적이 없는 그 세숫대야를 생각하면서, 집에 가면 그 세숫대야에 뜨신 물 붓고 발 좀 담가야지 한다. 비가 내린다. 부슬비다. 이 정도 비는 흩날려서 내 눈이나 코에나 들어가겠지, 입에 들어가면 배는 부르겠다- 라는 우습지도 않은 우스갯소리를 하며 퇴근을 서두르는데 빗줄기가 조금 굵어진다. 어쩔 수 없이 구석에 찡 박혀 있던 우산을 찾아 열심히 쓰고 걷는다. 항상 큰 우산만 써서 오늘도 파라솔 같은 우산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걷는다. 우산 안에 내가 다 들어가서 감춰지는 기분이 무척 좋다. 비가 와서 우산을 쓰는 게 아니라 우산을 쓰고 싶은데 때마침 비가 온 게 아닐까- 하는 망상도 잠시 해본다.      


갑자기 내린 비에 얇은 봄 코트를 우의 마냥 모자까지 야무지게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을 하는 사람도 있고 비가 오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라는 몸짓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는 사람도 있고 혹시 저건 낭만인가 싶게 보란 듯이 우산을 고이 접어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제 갈 길로 걷는 사람도 있다. 버스정류장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두 번 쓰면 찢어질 것 같은 비닐우산을 사서 나오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에게 씌워줄 우산을 들고 서성이는 남자 자리에 멈춰 하늘만 올려다보는 여자. 하나의 풍경 속에 이렇게나 다른 서로가 있다는 게 재미나서 나는 속도를 줄이며 파라솔 같은 우산을 살짝 머리 위로 들어본다. 여전히 흐린 하늘이다.      


세숫대야에 발을 담근다. 발등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살 것 같다. 새삼스레 세숫대야가 고마워 시선을 준다. 이때까지 쓰임과 다른 이름으로 불러서 미안하다고 한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 같아서 그것도 미안하다고 한다. 그래도 참으라고- 세숫대야 너보다 휴대전화가 사실은 더 고생이라고- 실상 연락을 하기 위한 용도보다 들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서 사람이 곁에 없으면 무조건 손에 들고 있다고- 휴대전화가 더 고생이니까 세숫대야 너는 좀 참으라고 말해본다.      


미안하게도 나의 일상은 종종 사람들과의 약속을 어기며 굴러간다. 세숫대야는 위로가 되고 파라솔 같은 우산은 간격이 되고 휴대전화 아이폰8은 내 곁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숫대야는 세수할 때 쓰고 우산은 비 올 때 쓴다고 말할 것이다. 휴대전화는 언제든지 내가 보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손에 잡고 흔들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사실 그거 다 거짓말이다- 하고 진실을 실토하겠지. 미안하지만 미안하지 않다.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아마 사람들 모두가 다 다른 이름들 몇 개쯤 가지고 살아갈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가겠지, 뭐.     


삼월인데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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