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었다.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제법 쨍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 나는 무작정 걷기로 했다. 무작정 걷는다고 말은 했지만 좋아하는 바다가 있는 그곳에 한번은 살고픈 마음을 품은 채 내가 살 곳을 찾으러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정도는 타야 닿을 거리라 구석진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창문을 열었다. 드르르릉 끽 타하- 드르르릉 끽 타하- 반복이 주는 안정감에 몸이 실리니 절로 잠이 왔다. 낮잠 같은 건 좀처럼 자지 않는데도 자동으로 눈이 감겼다. 그렇게 머리를 흔들어대며 자고 깨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그곳에 닿았다.
오랜만에 외출도 그렇게 올라탄 버스도 어색해서인지 순간 어디에 내려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이 도시의 버스는 빨리 가며 빨리 갔지 천천히를 용납해주지 않으므로 어디에 내려도 다 길이지 싶어 부리나케 내렸다. 점심시간 때라 사람들이 식당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어디 좋아 보이는 카페에 가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 들이키고 싶었으나 계절은 가고 있고 걷기로 했으므로 우선은 걷기로 한다. 도로가 난 쪽으론 회사들이 제법 있지만 한 블록만 안으로 들어가도 아파트와 원룸, 낡고 낮은 주택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는 주거단지의 형태를 띤 한낮의 동네는 생각보다 정적이었다. 지우개를 문지르면 지워질 것도 같고 물감으로 덧칠하면 있던 것들 모두가 사라질 것만 같은 풍경이다. 그 속으로 걸어가는 나도 이대로 희미해지는 걸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걸으면 그냥 걸어질 줄 알았는데, 차도 피해야 하고 마주 오는 사람들과 잘 어긋나야 한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되돌아 어느 곳으로든 발길을 잡아야 한다. 요령껏 걷고 또 걷다가 눈 끝 손 끝 발끝에 차이는 게 없어 이젠 좀 걸어볼까 싶으면 머릿속이 우당탕 이다. 걷기 위해 걸어도 생각들이 끼어들어 자꾸만 멈춘다. 오늘따라 죽기 살기란 단어가 그득하다. 나는 죽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면, 이러면 안 된다고 나를 다그치지만 이러면 안 되는 이유 같은 게 사실은 없으니 마음이 더 답답해지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마음을 묵혀둔다. 그래서 이렇게 불쑥 나오는 것이다. 죽으면 누군가 어떤 확률로 슬퍼할 뿐이고 죽음 같은 건 막을 수 없으니까- 죽고 싶어서 한다는 건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라고 혼자서만 인정한다. 한 번씩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면, 살아지는 거 말고 살아내는 걸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욕이 툭툭 튀어나온다. 예전엔 반대였던 거 같은데 맞는 건 없고 지금은 반대로다. 고개를 조금 숙여 땅으로 욕을 쏟아냈다. 내 욕을 받아내는 시멘트 바닥에 미안했다.
누군가 내게 흰색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대답을 했고 그럼 싫어하냐고 또 물었을 때,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내게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거 아니냐 반문했고, 나는 그런 건 아닌데- 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속으로 좋은지 싫은지를 묻고 또 물었다. 추궁에 가까웠고 조금 숨이 막혔다. 그때가 떠오른 건 나는 또 나를 숨 막히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고 싶은 건지 살고 싶은 건지 묻고 또 물었다. 오후 두 시의 해는 쨍쨍해지다 못해 타오르고 정말 숨쉬기가 곤란할 지경이라 어디라도 엉덩이를 붙일 수만 있다면 앉아야겠다 싶은데 꼭 이럴 때 카페가 보이지 않는다. 커피도 마시고 숨도 고르고 다리도 탈탈 털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몇 군데를 지나쳐버린 나의 흐리멍덩한 판단력의 결과다. 삼십 분을 더 걷고 나서야 널찍한 카페를 찾을 수 있었고 그야말로 크헙-(옆으로 지쳐 쓰러지는 소리)을 할 수 있었다.
흰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때의 대답을 지금에서야 한다. 좋음과 싫음은 얼핏 등이 하나인 듯 서로의 반대편에만 있을 것 같아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독자적인 단어다. 좋음과 싫음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정도와 다름이 자리하고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요, 살고 싶다고 죽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 별개의 것 별개의 마음이다. 별개를 자꾸만 한 묶음으로 묶으려 했던 내가 얄팍하게 느껴지면서도 알게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이다. 그래서 입으로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고 소리 내며 나에게 말해주었다.
조금 많이 쉬다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저녁의 풍경도 걸어봐야겠다 했는데, 나는 그 좋아하는 바다도 보지 않고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든 것 없는 가방이 공중으로 날리고 그래도 옷은 가지런히. 손발은 대충 씻고 침대에 모로 누워 아- 정말 집 밖은 위험해- 집 나가면 개고생- 이라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죽고 싶었고 살고 싶었던 오늘. 죽기엔 오늘따라 세상이 안전하고 평온한 것만 같고 살기엔 여전히 아무 일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쪽 마음이 더 컸을까. 모르겠지만, 알겠다. 그래서 나는 밥을 많이 먹었고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창밖 성당 쪽을 향해 던져버리고, 역시나 모로 누워 한없이 꿈만 꾸었다. 꿈에는 이상하게도 다정한 아빠가 나와서 나를 놀라게 했고,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하 호호 거리는 나를 조소하며 도대체 이게 무슨 개꿈인가- 하고 잠이 들었다.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