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na May 10. 2022

기다리는 일과 견디는 일

[사실 난 지금 기다린 만큼 더 기다릴 수 있지만 왠지 난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 거 같아요]      


검정치마의 <기다린 만큼 더>를 카더가든의 목소리로 들으며 뛰다가 걷다가 가만히 있는다. 다시 걸으며 기다리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잘 기다리는 나를 생각한다. 누구는 <네가? 잘 기다리긴 뭘 잘 기다리냐- 성질 안 내면 다행이다>라고 할 게 뻔하지만, 그건 대상이 특정되었을 경우고. 나는 버스도 잘 기다리고 택배도 잘 기다리고 사람들도 잘 기다린다. 맛이 끓어오를 때까지 잘 기다리고 부친 편지에 대한 답장도 잘 기다리고 통장에 돈이 꽂힐까 말까 하는 순간도 잘 기다린다. 기다리는 일은 알게 해주는 일이다. 버스가 온다는 걸 알게 해주고 택배는 곧 도착할 것이며 너라는 사람은 꼭 오리란 걸 알게 해준다. 또 기다림은 내가 낼 수 있는 최상의 맛으로, 서툴지만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손편지로, 어차피 다시 사라질 테지만 또다시 오겠다는 생존본능으로, 나를 살아가게 해준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기다리는 일은, 더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게 해주는 일이다.   

   

그저 날씨가 좋아서 버스를 얼른 보내고 나무 밑으로 가 총.총.총. 걷는다. 초록이 짙어 꽃보다 잎들이 생기롭다. 향이 멀리까지 퍼지진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비릿한 풀 내음 같은 게 맡아져 몸속까지 생생해진다. 쿠팡, 아이허브,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그리고 이름도 잘 모르는 어느 사이트까지.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것들 모두 주문취소다. 당장은 필요가 없고, 우선순위에 있지 못한 것들뿐. 가장 사고 싶은 것은 언제나 0이 하나씩 더 붙어 있고 나는 그 0을 빼고서야 주문을 누를 수 있으니까, 바로 결제가 아니라 굳이 담아 둔 것인데- 그러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취소해버린다. 굶어 죽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한 끼 정도는 건너뛰고, 답장이 오지 않아도 쓰고 싶을 땐 편지를 쓸 것이며, 통장에 돈 같은 건 정말이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서 기다리지 않는다. 뭐든 하지 않으니 마음이 가볍고 깨끗하다. 선택의 뒷면을 알게 해주는 것은 유일하게 기다림 뿐이다.     


잘 기다리면 잘 견뎌야지 하는 사람이 있다. 틀렸다. 나에겐 아니다. 견디는 일은 약속하지 않는다. 엄마가 없는 집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곳. 사랑은 한 톨도 없고 공포만 남은 곳. 돈도 없고 용기도 없는 나는 방문에 힘없이 붙어 있는 똑딱이로 된 잠금장치를 누르고 또 눌렀다. 벌벌 떨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지고 없어질 거 같아서.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생기지 않고 나는 영원히 문고리만 붙들고 있었다. 어떻게 7년이 넘는 세월을 참았니- 차라리 수술을 빨리 하지- 라는 말을 듣고도 더 안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걷지 못할 수도 있대요- 너무 어릴 때 수술을 하면 몇 번이고 수술을 해야 한 대요-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냥 그렇게 참고 살라고 했어요- 라고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선 나. 이를 악물고 견디기만 한 나.     


하염없이 내가 지겹고 아프고 슬퍼서 껍질이 있어 벗겨낼 수 있다면 수백 번 수만 번 벗겼을 테지만 껍질조차 없어서 그런 나를 매일 매일 견디는 일은 학교 운동장 모래 위에 물 조리개로 나만 쏙 들어갈 만큼 원을 작게 그리고 서 있는 일. 나를 땡하고 치든가- 나를 데리고 냅다 달리든가- 다시 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때려눕히든가- 여하튼 저하튼 뭐라도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햇볕이 원 안을 채우고 남아도 각인 된 것처럼 선은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입으로 할 줄 아는 욕이란 욕을 뱉어내면서 울고 울고 우는 일. 그것이 견디는 일이다. 견디는 일 같은 건 잘하고 싶지 않다.     


물론 기다리라는 말도, 견디라는 말고 누군가 내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식의 문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사람으로 살려면 사이 어디쯤을 걷다가 한쪽으로 치우쳐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남들은 덥다 덥다 하는데 나만 추워서 아래 위로 긴 팔을 입고 걸으면 다들 안 더운가? 하는 시선으로 나를 보는데- 나는 해가 들지 않는 곳에 있어보라지. 당신들도 나처럼 춥다 춥다 할걸. 하는데- 웬걸, 갑자기 여름이고 기모까지 들어 있는 옷을 입고 등에 땀을 흘리며 내일이 겨울이면 좋겠다, 크리스마스면 좋겠다, 캐롤을 들어볼까- 생각을 한다. 결국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다가- 그럼 도대체 이것은 기다리는 일인가 견디는 일인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동네 한바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