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커뮤니티는 마침내 와칸다라는 거대한 제국을 갖게 되었다.
< 블랙 팬서 > 개봉 전 평론가들의 한 줄 평이 공개되자 작은 논란이 있었다. 영화 얘기는 안 하고 흑인 커뮤니티 얘기만 하냐는 비판이었는데, 이후 영화가 개봉하고 나자 '흑인 얘기해야겠네...'라는 반응이 나오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 반응이 맞다. 흑인 커뮤니티 얘기를 안 하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를 반쪽으로 이해한 거다.
마블은 이렇게 진지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블랙 커뮤니티의 투쟁 역사와 그들의 현재 그리고 그들의 지향을 짙게 담아냈다. 등장인물의 90%를 흑인으로 캐스팅한 할리우드 상업 영화라는 사실부터가 특별하고, 그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시각 또한 주류의 문법과는 다르다. '마블의 가장 혁신적인 히어로'라는 선전 문구는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희귀 광물 비브라늄으로 강대한 문명을 구축한 와칸다 왕국은 아프리카 한가운데 위치하며 원시의 전통과 최첨단 과학 기술이 접목된 아프로 아메리칸의 드림 랜드다. 1970년대 펑크 음악도 SF와 밀접했고 디트로이트 테크노도 3003년의 사이버 디스토피아를 꿈꿨던 과거 블랙 문화의 염원이 겹친다. 와칸다가 특별한 것은 이 국가가 '인류의 기원' 아프리카 한가운데 위치한다는 점, 원시의 전통과 최첨단 과학 기술을 조화롭게 융합하며 정신적 가치인 힘과 정의를 가장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유토피아 중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곳도 없었을 뿐 아니라 흑인 중심의 사회는 그 누구도 구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디어는 아프리카와 흑인 국가를 미개하고 원시적으로 그려왔다. 와칸다는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힘의 논리와 이성의 지혜를 조화롭게 받아들여 중대사를 결정한다. 왕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인 결투를 치러야 하고, 고대의 의식을 거쳐 대전사 '블랙 팬서'로 거듭나지만 왕의 통치는 자비롭고 부족 연합을 민주적으로 통솔하며 그 기술력은 인간의 지혜를 극대화한 과학의 정수다.
자애로운 왕 트찰라와 유쾌하고 뛰어난 과학자인 여동생 슈리, 충성스러운 명예 전사 오코예와 그를 사랑하는 나키아가 등장하고 오히려 이 영화에서 어눌하다가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이는 전통적인 '흑인' 역할은 CIA 요원이라는 백인 로스가 맡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상당히 페미니즘적이기도 하다. 트찰라를 제외한 모든 핵심 인물들이 여성이고, 한술 더 떠 왕의 근위대가 여성이다. '나를 사랑하면서 죽일 수 있겠어?'라는 와카비의 말에 '와칸다를 위해선, 주저 없이.'라 차갑게 응답하며 단호하게 창을 겨누는 오코예의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 장면 중 하나다.
아버지의 서거로 왕위를 이어받은 트찰라와 이를 위협하는 킬몽거의 갈등은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와 가치관을 종합해서 보여준다. 유년기의 에릭이 잔혹한 용병 '킬몽거'로 거듭난 이유는 생존을 위해 잔혹한 범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블랙 커뮤니티의 현실이었다. 와칸다는 강력한 왕국임에도 그 힘을 숨기려 하고, 킬몽거는 이를 활용해 억압받는 '동포'들을 해방하고자 한다. '인류의 고향이 바로 이 곳인데, 지구 상의 흑인들이 어째서 동족이 아닌가?'라는 킬몽거의 분노는 흔한 악당의 욕망과는 다르다.
어쩌면 그 힘을 숨겨야 했던 와칸다 왕국의 현실은 로자 파크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체포당하기 전의 블랙 커뮤니티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틴 루터 킹이 그의 원대한 꿈을 말하고 몇 번의 헌법이 수정되었음에도 블랙 커뮤니티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싸워야 했고 높은 현실의 벽에 침묵하거나 마약에 취하고 총알을 장전해야 했다. 흑인 대통령의 시대에 소년 트레이본 마틴이 '자경단원'에게 총을 맞았고 'Black Lives Matter'라는 당연한 문장이 분노의 구호로 거리에 터져 나왔다.
킬몽거는 이런 사회에 와칸다의 힘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지구 상 대적할 무기가 없는 비브라늄 무기를 전 세계 블랙 커뮤니티에 보내 무력 저항을 선도한다. 트찰라 역시 와칸다의 힘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킬몽거가 탄생한 오클랜드 슬럼가에 대규모 의료지원시설을 건설하는 것이다.
와칸다 왕국을 위협하는 킬몽거에 대해 트찰라는 '우리 모두가 만든 괴물'이라 평을 남긴다. 블랙 커뮤니티는 스스로 그 지위를 높여간다. 패션과 음악, 스포츠, 영화 산업까지 신장된 블랙 파워를 통해 그들은 미국 문화의 뿌리이자 현재다. 아프로 아메리칸들에게 < 블랙 팬서 >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영화다.
< 토르 : 라그나로크 >에서 유쾌함의 정점을 찍은 마블은 < 블랙 팬서 >로 정반대의 진지한 모습을 담아냈다. 다만 그 스토리라인이 진부한 감이 없지 않고 여태까지의 마블 시네마틱과 비교해보면 액션 씬이 빈약하긴 하다. 영화에서 하도 얻어터지는데 원래 블랙 팬서는 캡틴 아메리카랑도 1:1을 뜨고 아이언맨도 우습게 이길 수 있는 인간계 최강 캐릭터 중 하나다. 정치극과 오락 영화의 타협점을 찾아나가면서 < 어벤저스 : 인피니트 워 >를 잇는 가교 역할까지 수행해야 하니 < 블랙 팬서 >의 색채는 상대적으로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첨단 도시 와칸다와 형형색색 빛나는 부족민들의 의상과 스타일은 섬세하게 잘 가공되었다. 사실 좀 지루하기도 했다(...).
< 문라이트 >를 보고 극장을 나갈 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 블랙 팬서 >는 기존 평범한 할리우드 히어로물의 문법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지만, 블랙 커뮤니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를 낯설게 느끼는 모두에게 혁신을 불러일으킨다. 래퍼 로직(Logic)이 'Black Spiderman'에서 '블랙 스파이더맨이 등장해야 해'라 노래한 지 1년 만에 마블은 '블랙 팬서'를 이토록 웅장하고 멋지게 구현해냈다.
켄드릭 라마가 나비를 착취하고 ( < To Pimp A Butterfly >), 비욘세가 슈퍼볼에서 대형('Formation')을 갖추며 푸른 달빛 아래 모든 흑인들을 세우는 노력 끝에 ( < 문라이트 > ) 블랙 커뮤니티는 마침내 와칸다라는 거대한 제국을 갖게 되었다. 사상 최악의 도널드 트럼프가 지배하는, 2018 미국에서.
* 영화 자체에 기대는 없었고 켄드릭이 만든 OST가 흥미로워서 보러 갔다. 하지만 노래는 진짜 쬐끔 나온다 위스키 한쟌 쥬쉐요보다 덜 나온다. 앨범이 안 좋다는 건 아님! 블랙 팬서 영화를 보고 켄드릭과 아메리칸 블랙 커뮤니티 동무들이 만든 2차 창작이라고 보면 될 듯 그건 조만간 다시 써볼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