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천장에 도전하는 테니스 스타의 고뇌, 그리고 업적.
1960년대 테니스 스타 빌리 진 킹은 뛰어난 실력과 적극적인 인권 운동으로 여성 스포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업계에 일반적이었던 성차별적인 관념과 그로부터 이어진 상금 차별으로부터 그는 독립적인 여성 테니스 협회를 설립했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벤트 매치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향후 커밍아웃을 통해 LGBTQ 커뮤니티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 빌리 진 킹 : 세기의 대결 >은 1973년 테니스 명예의 전당 입성자 바비 릭스가 제안한 성 대결에서 승리하며 여성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는 캐릭터들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빌리 진 킹의 도전을 거대한 의미로 끌어올린다. 도박에 빠져 가정을 잃은 바비 릭스는 스티브 카렐의 능글맞은 연기를 통해 가식과 쇼맨십, 영악한 인터뷰로 여성들을 깎아내리며, 테니스 계의 올드 레전드 잭 크레이머는 신사다운 이미지 아래 뿌리 깊은 여성에 대한 비하를 깔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중년 남성들은 도박꾼이거나 위선을 떠는 존재들이고, 바비의 편에 선 그의 아들인 래리와 코치 정도가 양심과 정의의 문제에서 갈등하지만 권력과 기성의 서커스에서 내려오지는 못한다. 반면 여성들은 당당하고, 자유로우며, 신세대의 사고방식을 갖췄다. 냉정하면서도 특유의 수완으로 여성 테니스 협회를 이끄는 골초 그레이스와 여자 테니스 협회의 자신감 넘치는 1달러 계약 선수들, 그리고 빌리 진 킹을 홀린 마릴린 역시 용기 있는 선택을 통해 주인공에게 힘을 실어준다.
선명한 대립 구조 속에서 빌리 진 킹은 고뇌와 갈등을 거듭한다. 마릴린이 삶에 찾아오면서 평범한 이성애자인 줄 알았던 성 정체성이 흔들리고, 이는 경기력에 악영향을 주어 테니스 랭킹 1위 자리를 경쟁자 마거릿에게 넘겨주고 만다. 호기롭게 시작한 여자 테니스 협회와 바비 릭스의 제안에 전미 여자 스포츠 선수들과 더불어 평범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걸려있다는 사실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기도 한다. 바비 릭스의 도박에 말려들지 않았던 그는 1차 '배틀 오브 섹스'에서 마거릿이 참패하고 세상이 다시금 고정관념을 떠들어댈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레이스의 대사를 빌리자면, '교통사고처럼 거대한 운명에 치이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테니스는 스포츠를 넘어 여성 인권의 증명이 되어야만 했다.
이처럼 < 빌리 진 킹 >은 경기 자체에 몰입하기보다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개인적 정체성 갈등을 동시에 겪는 빌리 진 킹을 집중 조명한다. 오만한 바비 릭스를 상대로 치밀한 노력 끝에 승리하는 그의 모습은 사회 변화를 위해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하는 한 개인의 고독한 싸움을 기리는 전기의 형태로 그려진다. 그래서 영화는 영웅담이면서도 영웅담이 아니기도 하며,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았으면서도 개인의 심리 역시 투영한 입체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일상을 떠나지 않는 혐오와 비하, 차별에 대해 40여 년 전 목소리를 낸 테니스 스타를 통해 잔존하는 전근대적 시각을 비판하고, '언젠가는 인정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아직도 그 아름다운 세상은 완전히 오지 않았지만, 빌리 진 킹 같은 이들의 헌신은 보다 공정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젠더 문제에 대해 뜨거운 심장으로 접근하여 차가운 머리로 풀어낸 좋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어떤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슈퍼히어로 원더우먼이나 스포츠 스타 빌리 진 킹, 거대 팝 스타 비욘세나 레이디 가가만이 성차별과 성소수자 문제를 해결할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자유로운 삶이라 하지만 누구도 관심 없는 아웃사이더 마릴린의 이야기나, 협회의 테니스 동지들이 겪었을 갈등은 없었을까? 대단한 몇 명보다는 평범한 수백, 수천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차별과 그들의 저항도 보고 싶다. 빌리 진 킹의 대사처럼 '세상을 바꾸려면 최고가 되어야' 하지만, 그 행동은 최고보단 우리의 일상을 함께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 현실로 다가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