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헌 Dec 25. 2016

꿈을 저당 잡힌 소녀들에게.

프로듀스 101을 돌아보며.

처음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적은 노트를 다시 찾아봤다. 기획의 황당함부터 AKB 스타일에 대한 성토, 삭막해도 너무 삭막한 시스템, 꿈을 꾸는 소녀들에게 형편없는 무대... 이런 의례적인 메모 속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응원하고 있던, 무대 아래서 단출한 종이 패널과 스마트폰 문구로 딸들을 응원하던 어머니 아버지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열한 명의 아이오아이와 나머지 90명의 연습생들은 2016년 초 가장 주목받는 소녀들이었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일거수일투족이 촘촘한 1인 캠, 셀카, 비하인드 영상, 공식 미션, 실시간 문자 투표로 평가받았고 매주 탈락의 고비를 넘어서는 소녀들은 마치 < 배틀 로얄 >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끊이질 않는 나이기에 분위기는 더없이 발랄하고 활기찼지만, 이내 보이지 않는 경쟁과 서늘한 눈치 싸움에 숨을 죽여야 했다.


프로그램은 각자 개성을 드러낼 수 없는 시스템으로 구성되었고 약간의 오해는 편집을 빌어 인성 논란으로 인터넷 게시판을 달궜다. 제작진들은 절실한 연습생들의 눈물을 비추면서 그들을 실험하고, 시험하며 판단의 주체를 대중에게 떠넘겼다. 기획자라는 사람은 이 모든 걸 '남자들을 위한 야동'이라고 당당히 이름 붙였다. 이 갖은 고초를 겪고 데뷔한 아이오아이는 그야말로 쉴 틈 없이 2016년 한 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휴식기를 가지려는 찰나엔 원 소속사 활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Produce 101 - Pick Me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왜 우리가 < 프로듀스 101 >에 열광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우리는 그 속의 경쟁과 완전체 11인조를 보고 싶었다기보단, 정말 누가 봐도 불공평한 저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소녀들을 응원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오아이가 '너무너무너무' 지독하게 '픽 미 픽 미'만 추더라도, 김세정 강미나가 구구단으로 정채연이 다이아로 이탈하며 단 일곱 명만 유닛으로 활동하더라도, 그 나머지 87명이 무얼 하고 있는지 좀체 알 수 없더라도 계속 그들의 뉴스를 구독하고 그들을 찾아 보고 그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현상까지 의도한 거라면 < 프로듀스 101 > 제작진들은 정말로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삼산 체육관에서 진행된 마지막 화에서 소녀들은 '벚꽃이 지면 우리 사랑은 여름처럼 뜨거워질 수 있나요'라며 이별과 시작을 공유했다. 꿈 하나만 믿고 달려가는 101명 소녀들을 외면하기엔 너무도 삭막하고, 냉정하며, 산업적이고 비정한 사회였다. 어쩔 수 없이 마음속으로 잘 되기를 바라던 이 마음이 적어도 2017년엔 조금이나마 공정한 시스템으로 보상되길 바라보는 수밖에. 이래서 '꿈'은 참 무섭고, 이 '꿈'을 이용하는 사회는 더 섬뜩하다. 점점 더 지옥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만 같은 아이돌 시장이 더 이상 그들의 희망과 눈물까지 저당으로 사용하진 않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붐의 눈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