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성소수자, 여성 인권, 도널드 트럼프
연대와 화합, 불의에의 저항. 현지 시각 6월 10일 뉴욕에서 열린 제 72회 토니 어워즈(Tony Awards)가 21세기 문화계에 던진 메시지다. 미 연극계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토니 어워즈는 과거 브로드웨이 황금기였던 1940 ~ 1960년대 이후 다시 찾아온 뮤지컬 전성기에 힘입어 화려한 성과와 과감한 사회적 발언을 통해 점차 문화계에서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미투 운동부터 성소수자,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까지. 토니 어워즈에서 주목할 부분을 해쉬태그(#)로 짚어본다.
올해 토니 어워즈 최고 영예의 주인공은 < 더 밴드 비지트(The Band Visit) >다. 최고의 작품,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최고의 스코어 등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2008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 < 밴드 비지트 : 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 >을 기반으로 한 이 뮤지컬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경찰 악단'이 이스라엘에 투어를 왔다 외딴 도시로 잘못 가게 되면서 겪는 일을 그렸다. 언어, 문화, 종교의 차이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따스한 이야기와 이국의 흥취를 담은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최고조 갈등 상황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현실에 비춰보면 굉장히 모순적인 작품이지만, < 더 밴드 비지트 >는 낯선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음을 잔잔히 전한다. 일각에선 이 뮤지컬이 도널드 트럼프의 반 이민주의 정책에 대한 조용한 저항의 상징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미 토니 어워즈는 2016년, 미국 건국의 역사를 유색 인종 배우들과 함께 랩으로 풀어낸 뮤지컬 < 해밀턴 >에 11개 부문 수상을 안기며 다문화, 다인종 사회인 21세기를 상징한 바 있다.
<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 시리즈의 주인공 앤드류 가필드는 연극 < 엔젤스 인 아메리카(Angels In America) >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처음으로 토니상을 수상했다. 1993년 토니 쿠쉬너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동성애, 양성애는 물론 에이즈 환자들을 주인공으로 앞세워 그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 앤드류 가필드는 수상 소감을 통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차별받지 않을, 억압에 굴복하지 않을 순수한 정신을 가진 LGBTQ 커뮤니티에' 영예를 돌렸다.
얼마 전 종교적 이유로 동성애 커플에게 웨딩 케이크를 팔지 않은 제빵사에게 승소 판결을 내린 미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도 멋진 한 마디를 통해 비판을 가했다. '케이크를 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우리 모두 케이크를 쿠웁시다.'
이번 토니상 후보작 중 또한 인상깊었던 작품은 뮤지컬 계의 고전 <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의 리바이벌이었다. 1957년 초연 이후로 숱한 리부트를 통해 시대마다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바 있지만, 2018년의 리메이크는 할리우드를 강타한 미투(#MeToo) 무브먼트와 맞물리며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됐다.
'지나가던 하층 계급의 여성을 두 명의 신사가 데려가 교양 있게 바꿔놓는다'는 여성 비하적인 면모의 스토리를 교정했다. 맨스플레인(Mansplain)적 남자 주연을 대폭 수정하고, 여주인공 엘라이자에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새 정체성을 부여했다. 이에 < 마이 페어 레이디 > 2018 버전은 시리즈 역사상 가장 많은 토니 어워즈 10개 부문 노미네이트를 일궈내며 변화하는 시대에 성공적으로 발을 맞춰나가는, 바람직한 리바이벌의 예로 자리하게 됐다. 유사한 예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을 뮤지컬로 옮긴 <프로즌> 기획자들 또한 ‘연대하는 여성들의 사랑과 힘’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 바 있다.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마음먹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소리 했다. 특별상을 수상한 로큰롤의 ‘보스(Boss)’,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무대를 소개하며 ‘한마디만 더 할게요, 엿 먹어 트럼프!(F**k You, Trump!)’라 일갈한 것.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 홀의 관객들은 기립하여 박수갈채를 보내고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2016년 이미 트럼프를 ‘국가적 재앙’이라 부른 바 있던 드니로기에 납득은 가지만, 갑작스러운 발언에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브로드웨이와 트럼프의 갈등이 본격화된 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뮤지컬 < 해밀턴 >을 관람했던 지난 2016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박대와 반 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펜스 부통령을 거대한 야유로 맞은 관객과 더불어, 공연 후에는 애런 버 역을 맡은 배우 브랜든 딕슨이 트럼프 행정부의 차별적 사상에 대한 우려를 성명서 형태로 작성해 읽기도 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무례한 행동에 사과하라’며 분노했지만, 딕슨은 사과할 일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로버트 드니로의 육두문자는 곧 브로드웨이 전체의 목소리였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평생 공로상 수상 소감 시간이 달랑 3초인 건 너무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오페라의 유령> 등 시대를 수놓은 뮤지컬 명곡의 주인공 아닌가. 배우들의 수상 소감은 길게 보장하면서 무대 뒤에서 힘쓴 대본 작가들과 스코어 아티스트들의 수상은 광고 시간에 밀려 가려졌다. 제일 억울할 작품도 있으니 < 퀸카로 살아남는 법 >. 12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나 단 하나의 트로피도 가져가지 못했다. 2004년 개봉한 동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유명 코미디언 티나 페이(Tina Fey)가 각본을 쓰며 브로드웨이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성적으로 압도하는 < 더 밴드 비지트 >에 영예를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