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헌 Jan 15. 2017

너의 이름은

운명을 찾으며, 운명을 거슬러가며. 

잡히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찾게 되는 건 

그 무언가가 언젠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어떻게든, 애타게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 너의 이름은. >은 일상 속 끝없이 반복되는 우연과 막연한 감정의 요동, 인연의 질긴 끈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좀 더 애절해야 하고, 좀 더 다정해야 하며, 좀 더 간절해야 한다. 


*스포일러 일부 포함.



흔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나 우연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때의 일이라는 얘기를 농담처럼 하곤 한다. 그러나 관계가 진지할수록, 애잔해질수록 그 추측은 확신 혹은 강한 믿음이 된다. 그래야만 이런 만남과 이런 이야기들이 납득될 것만 같고 나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아서다. 운명의 힘과 자연의 질서, 시간의 장난 등 우리의 이야기에 힘을 실어줄 것들은 많다. 그렇게 인연의 실타래는 매여가고, 단단한 매듭이 되어 꽉 묶이게 된다. 너무도 꽁꽁 조여있기에 이를 풀어내는 방법은 잘라내는 것뿐이다. 그래서 단절은 아프고 이별은 두렵다. 


前前前世 (movie ver.) RADWIMPS MV


< 너의 이름은. >은 그래서, 어딘가로부터 계속 벗어나려는 느낌을 준다. 아무도 몰랐던 그 재앙을 막아보고 싶다.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찾아가 만나고 싶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곳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결국,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는, '너'를 찾고 싶다. 그리고 다시금 묻고 싶다. '너의 이름을.'


이 때문에 영화는 지극히 운명론적 바탕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헤어나고자 하는 양면성을 가진다. 마을에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 있는 타키 (혹은 미츠하)에게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심지어 바로 그 운명과 시간의 이어짐을 알려줬으며 손녀의 변화를 알고 있는 할머니조차도 '의외로 평범한 할머니'가 된다. 운명을 거슬러 사건을 바꾼 두 주인공이 결국 재회하는 건 운명적 이끌림의 길을 따라서다. 모든 기억을 잃고 무슨 일이 있었는조차 알수도, 알 필요도 없는 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을 따라 기어코 서로에게로 다가간다. 


끝까지 필연의 편에 서려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의지다. 서로를 무심히 지나쳤던 < 초속 5센티미터 >의 두 남녀와 달리 타키와 미츠하는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5년 전과 달리 서로를 알아본다. 그건 앞서 말했던 바로 그 이유에서인지도 모르는데, 평범한 스쳐감과 마주침에서도 끝끝내 둘은 이어지고 만다. 연결되고 만다. 정답 없는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서 묵인되는 약간의 기적처럼. 마지막 장면이 특히 감동적인 건 그 약간의 열외를 인정한 재량이 진한 여운을 남긴 덕이다.



시간, 공간, 가치와 의미를 부지런히 오가는 내용인지라 관람 후에도 이렇다 저렇다 명쾌한 결론이 내려지진 않는다. 그러나 새삼 잊고 있던 평범 속의 귀중함에 대해선 깊은 낭만 (혹은 확신을) 품게 된다. 여태 전생이라 하면 대부분 우울한 이야기가 많았다. 너와 나는 이런 악연이었기에 헤어질 수 밖에 없어. 우린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 타키와 미츠하는 기어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인연의 실타래를 다시 매고자 준비한다. 해피 엔딩.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얼마나 눈물 나도록 기쁜 일인지. 얼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시간의 축복인 것인지. 


이런 일상적 공상을 너무도 아름다운 영상과 황홀한 음악, 신비로운 판타지로 풀어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능이 부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놓쳐선 안 될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