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서 듣는 명곡에서 노동요가 되다. 한 시대가 지나간다.
최근 유튜브에 접속하면 추천 영상 목록에서 심심찮게 ‘노동요’를 발견한다. 한 시간에 달하는 길이, 핵폭발 버섯구름을 바라보는 <세서미 스트리트>의 엘모(Elmo)로 꾸민 표지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영상은 조회수 3백만을 돌파한 히트 작품이다. ‘노동요’의 성공은 ‘마감을 향해 달려가는 노동요’, ‘2018 노동요’ 등으로 확산되며 하나의 유행을 이끌고 있다.
‘노동요’의 정체는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까지의 케이팝 아이돌 히트곡을 모아놓은 플레이리스트다. 단순한 노래 모음집이 아니다. 수록곡과 러닝타임은 각 영상마다 다르지만 ‘노동요’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공유한다.
모든 곡은 정상 스피드의 1.5배 ~ 2배속으로 재생되며,
단순히 ‘추억의 옛 노래’를 넘어 ‘내적 흥분’을 일으키는 강한 비트와 리듬의 곡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리스트는 마감, 과제, 업무의 속도를 비약적으로 촉진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내 밀린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약', '이 노래면 연간 대한민국 경제성장률 10%는 거뜬하다', '노동요를 듣고 대본 쓰는 속도가 향상되었습니다'는 댓글창의 간증(?)은 이 리스트의 인기를 더욱 부채질한다. 말 그대로 '노동요'인 셈이다.
이 콘텐츠를 처음 기획한 유튜브 계정 주인은 단 두 개의 영상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본인은 정말 그저 일하면서 들으려고 만들어놓은 리스트였겠지만, 2018년 현재 유튜브에서의 유행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시절 가요를 재조명하며 ‘숨어서 듣는 명곡’이라는 호칭을 선사하기까지 이르렀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선 이 노래들을 엮어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함은 물론, SBS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스브스뉴스’는 아예 노동요의 주인 그룹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콘텐츠를 제작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노동요의 면면을 살펴보자. ‘숨어서’라는 제목답게 도통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민망한 가사들이 주를 이룬다. ‘라틴 걸, 멕시칸 걸, 코리안 걸, 재팬 걸’을 외치는 제국의 아이들의 ‘마젤토브’, 2008년 당시에도 ‘병맛’ 콘셉트로 화제였던 오렌지 캬라멜의 ‘마법소녀’, 힙합 걸을 표방 했지만 애교와 박력 사이서 애매했던 파이브돌스의 ‘이러쿵 저러쿵’ 등이 근 10년 전 아이돌 시장의 유행을 간접 안내한다.
그 시절은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후렴부 하나만 만들면 성공이 보장되던 ‘후크송’의 시기였다. 소녀시대의 ‘Gee’를 필두로 티아라의 ‘보핍보핍’과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부터, 그 중독성이 너무 심해 매년 고3 수험생들을 괴롭히는 ‘수능 금지곡’으로 자리매김한 악명 높은 SS501의 ‘I’m your man’과 샤이니 ‘Ring ding dong’ 등이 뒤를 따른다. 비교적 최근(?) 아티스트로는 ‘위아래’의 EXID, 씨스타, AOA와 블락비 등을 꼽을 수 있겠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 아이돌 그룹들은 말 그대로 가요계를 지배하고 또 지탱한 존재였다. 음반 시장 불황이 가속화되던 시기였음에도 그들의 앨범은 항상 준수한 판매고를 올렸으며, 지상파 음악 방송부터 전국 방방 곳곳 어디든 이들의 노래가 곧 유행 가였음은 물론 '한류 열풍'의 초석을 닦았다.
덧붙여 이들은 1990년대의 ‘1세대 아이돌’과도 확연히 구분됐다. 힙합/알앤비 베이스의 댄스 음악 대신 일렉트로니카를 적극 도입하며 현재 케이팝의 틀을 형성함은 물론 그룹 기획 단계에서 콘셉트의 중요성을 대두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를 한국 대중음악의 암흑기로 꼽는다. 아이돌 그룹만이 살아남는, 대규모 기획사 시스템이 구축되자 그들의 노래 역시 천편일률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당대 유행했던 음성 변조 기술 오토튠(Auto-Tune)을 쓰지 않는 아이돌이 드물었고, 작사/작곡가들은 노래 멜로디나 가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후렴 부만 중독성 있게 만들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 스타일을 남용 / 양산하면서 대중의 피로가 극에 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이돌은 분명 가요계 최정상에서 군림했고 그들의 노래를 듣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고평가 하기 어려운 무언의 사회적 동의 역시 존재했다. 조악한 콘셉트와 너무도 비슷한 스타일이 양산되다 보니 ‘아이돌 음악은 질적으로 낮은 음악’이라는 편견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숨어서 듣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노동요’를 만들고 열광하는 이들은 그 시기 청소년과 20대 초를 보냈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 태어난 세대다. 유튜브 댓글엔 심심찮게 ‘추억의 명곡’이란 표현을 찾을 수 있다. 기성세대가 유튜브로 ‘흘러간 추억의 팝송 리스트’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고, 1990년대 말 가요 시장을 다시 불러온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과 유사한 현상이다.
학생 신분에서 주력 소비 계층으로 떠오른 이들이 그리워하는 레트로, 그것이 ‘노동요’ 시리즈로 대표되는 그 시절 케이팝 곡들인 셈이다. 10년 후에도 ‘노동요 리스트’가 만들어진다면 그 목록에는 트와이스, BTS, 아이즈원, 레드 벨벳, 엑소, 블랙핑크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겠다. 다만 그 곡들이 ‘숨어서 듣는 명곡’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오진 않을 것이다. 당당히 들을 만큼 지금 케이팝은 꽤 많은 발전을 이뤘다.
파이브돌스의 멤버 서은교는 11월 22일 ‘스브스뉴스’ <문명 특급>에 출연해 ‘이제 더 이상 숨어서 듣지 마세요. 절대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라 말하며 유쾌하게 과거를 회상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며 업무 효율을 높이고 있을 노동요 리스트를 보며 묘한 위화감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이토록 자연스럽게, 한 시대가 지나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