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과 블랙클랜스맨, 넷플릭스와 로마
적어도 인종 문제에서 아카데미는 그래미보단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인종차별적이고 유색 인종의 문법을 무시했다면 몇 년 전 그 해프닝을 거쳐서 <라라랜드> 대신 <문라이트>를 선택하진 않았을 거다.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가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했고 1984년 이후 최초의 연출 계열 흑인 수상자가 등장했다. <보헤미안 랩소디> 라미 말렉은 이집트계 핏줄에 이민자 출신 게이 보컬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조연상 부문을 석권한 마허샬라 알리, 레지나 킹 모두 흑인 배우다.
이 날 각색상을 받은 <블랙클랜스맨> 감독 스파이크 리는 '2020년 대선에서 사람과 증오 사이 올바른 선택을 하라'며 할리우드의 안티 도널드 트럼프와 인종차별 철폐 정신을 강조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다움'에서 <그린 북>이 <블랙클랜스맨>을 이겼다.
<그린 북>이 비판받는 건 이 영화가 1960년대 블랙 커뮤니티의 비참한 삶과 현재 진행형의 인종차별 문제를 '대화와 포용'이라는 낭만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다. 영화 속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의 돈독한 관계는 발레롱가 측의 시선일 뿐이었고 현실은 그리 편안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처절한 현실을 환상으로 덮었다는 의견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블랙클랜스맨>대신 <그린 북>에게 영예를 내린 것이 나쁜 결정이라 보진 않는다. <블랙클랜스맨>이 현실 고발과 투쟁이라면 <그린 북>은 화합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분열과 대립의 트럼프 행정부 아래서 '다 같이 힘을 모으고 이해와 존중으로 맞서자'는 '은근한 저항'을 택한 것이다. 백인의 시선, 백인의 터치라는 비판보다 그들이 강조한 메시지 자체에 더 감명받은 결과라 본다.
아카데미가 그래미보다 보수적인 지점도 있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감독상과 외국어 작품상에 만족해야 했다. 아예 넷플릭스를 금지해버린 칸영화제보다는 좋은 결정이지만, <그린 북> 대신 <로마>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해야 했다는 의견도 많다. 사실 이 논쟁은 인종적 문제보단 플랫폼의 문제, 그중에서도 넷플릭스와 극장가의 문제다.
과연 넷플릭스는 전통 영화로 인정될 수 있을까? 음악과 영화의 스트리밍은 다르다. 제한된 공간에 모인 관객들의 암묵적 동의 아래 정면의 스크린에 오롯이 집중하는 '경험'... 이 '경험'이 지하철 스마트폰으로도, 태블릿 화면으로도, 거실의 TV로도 동일하게 제공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인가?
'시네마의 역사와 인터넷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라는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의 토로를 생각해본다. 그런데 <로마>와 <카우보이의 노래>는 기존 시네마의 제도 하에서는 탄생하지도 못했을 영화다. '손 안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일반화되며 매년 극장을 찾는 관객은 세계적으로 감소 추세다. 영화를 위해 인터넷을 금지하는 시상식과, 영화를 위해 인터넷을 찾는 창작자들의 대립이 묘한 광경을 자아낸다.
넷플릭스는 자본의 힘으로 창작의 자유를 허한다. 독특한 시나리오와 다양한 촬영 기법,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형태가 넷플릭스의 생태계 안에서 자유로이 거닐 수 있다. 작년 디즈니가 10편의 영화를 제작할 때 넷플릭스는 82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아카데미는 넷플릭스를 부정하진 않았으나 최고의 영예를 선사하는 데는 머뭇거렸다.
공교롭게도 아카데미는 이번 시상식에서 촬영, 편집, 분장 단편 부문 시상을 광고 송출 도중 진행하기로 했다가 감독들의 큰 반대에 부딪쳤고 '인기 영화 부문'을 신설하려다 마찬가지로 비판을 받았다. 상업적인 플랫폼에는 보수적인 모습이면서 가장 상업적인 광고와 상업성에 권위를 부여하려 했다는 시도가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