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리스>, 지독한 냉소의 우화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에선 어떤 생명력도 감지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설원에서 로우 앵글로 붙잡은 나무 가지는 더욱 앙상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잿빛 도시와 잿빛 건물, 잿빛의 어른 세상에서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영혼을 베인 아이는 영화 내내 돌아오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사랑은 없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는 2003년 <리턴>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속 불완전하고 성하지 않던 아버지를 두 아들에게 마주시켰다. 그러나 <러브리스>의 냉정한 가정에 비하면 죽은 줄 알았던 혈육의 명령과 억압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인다. 이혼을 준비하는 제냐와 보리스는 서로를 향해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내며 열두 살 아들 알로샤의 존재를 짖뭉갠다. 제냐에게 알로샤는 인생을 망친 존재, 보리스에게 알로샤는 영혼 없는 사랑의 부속물이다. 반항하던 아이는 어둠 속에서 서럽게 눈물 흘린다.
둘은 이미 각자 내연 관계를 맺고 있다. 이혼 경력과 아이가 가정적인 직장 생활에 걸림돌이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보리스는 젊은 여인 마샤를 임신시킨 후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나이 든 부호를 선택한 제냐는 면대면 관계 대신 스마트폰 화면에 열중한다. 그들은 ‘실수로 낳은’ 열두 살 아들이 그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빠트렸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삭막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말로 이 어린 아들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짧은 초반부를 끝으로 알로샤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제냐와 보리스는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불행의 시작을 되짚어가며 신경을 긁어놓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공권력을 담당해야 할 경찰 역시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고, 그 자리는 체계적인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대체된다. 음울한 도심 외곽을 수색하던 집단은 황량한 자연 속으로, 모든 것이 파편화된 낡은 건물로 점차 수색의 범위를 좁혀나간다.
<리바이어던>은 거대한 국가 권력 앞에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나약한 개인의 눈물겨운 투쟁을 담은 영화였다. <러브리스>의 시선이 그보다 더 비관적인 것은 이미 그 패배한 사회를 다룸은 물론 일말의 따스함을 품고 있어야 할 사회의 기본 구성체 가정조차 놀랍도록 해체되었음을 앙상하게 보이는 탓이다. 바닷가에 커다란 고래의 백골을 흘려보냈던 전작처럼, <러브리스>는 끊임없이 망가지고 부서진 조각들과 앙상한 자연의 모습을 교차 제시한다. 그 속의 인간들은 마찬가지로 잿빛이거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몸놀림으로 일관할 뿐이다.
‘신 러시아의 차르’ 푸틴 1기가 만든 <리턴>은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대의 아버지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 푸틴에 의해 새로운 제정이 수립된 러시아 공화국에서,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는 흔들리는 사회도덕과 무감각한 러시아 시민들을 한 편의 메마른 우화로 그린다.
자본주의 체제의 완벽한 부속품이 된 보리스에게 임신과 출산, 양육은 여성의 전유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휘황찬란함에 눈이 먼 제냐 역시 하룻밤 새의 쾌락과 감정 소모만이 필요하다. 이런 비극은 도시 외곽에 사는 제냐의 엄마가 하나뿐인 딸에게 살벌한 독설을 퍼붓는 장면으로 더욱 심화된다. 하룻밤의 쾌락 앞에 사랑은 너무도 쉽게 언급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기에 한 개인은 너무도 미성숙하다. 아들이 실종된 후 아버지는 가정적인 직장 생활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능을 부각할 수 있는 선에서만 최선을 다한다.
공동체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망각한 사회는 결국 아이를 포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 이어진다. 사랑 하나 없다고 해서 무너질 시스템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파편화된 이혼 가정의 삭막한 분위기에서 아무 의미 없이 스쳐간다. 러닝 머신 위에서 관객을 직접 마주하는 제냐가 ‘러시아’ 재킷을 입고 있는 장면은 쓸쓸한 냉소를 짓게 한다.
즈비아긴체프의 차가운 상실감은 극 초반 서럽게 소리 죽여 오열하는 알로샤의 상을 각인한다. 허기지고 고독한 현대인들이 맹목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사이 진정 사랑이 필요한 자리는 앙상하게 비워가고 자욱한 눈보라에 덮여 사라져 간다. 사랑을 도구화하는 슬픈 현대인, 슬픈 러시아, 슬픈 체제, 슬픈 우리의 차가운 민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