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헌 May 20. 2019

테리 길리엄이
돈키호테를 살해한 까닭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 몽상가의 투쟁과 회한, 그리고 전승


자, 산초여, 저쪽을 보아라.
서른,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흉악한 거인들이 버티고 서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전투다…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중 -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만큼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영화는 흔치 않다. 감독 테리 길리엄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것이 1989년이었고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한 해가 1998년이니,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는 어언 30년 세월을 거쳐 세상에 등장한 작품인 셈이다. 그 시간 동안 돈키호테 배역을 맡았던 장 로슈포르와 존 허트가 세상을 떠났고, 주인공 토비는 조니 뎁, 이완 맥그리거를 거쳐 아담 드라이버의 몫이 되었다.

제작비를 확보하지 못해 수차례 촬영을 중단했고 그 와중 프로듀서 파올로 브랑코와 원수지간이 되어 칸 영화제 출품과 영화 개봉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테리 길리엄은 정말로 ‘풍차에 돌진하는 누더기 기사’의 모습을 향해 갔다.

그 기간 동안 범접할 수 없는 상상력을 펼쳐내던 감독의 세계도 쇠락했다. 1985년 SF의 명작 < 브라질 >부터 1990년대의 명작 < 12 몽키스 >, 20세기를 닫은  <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까지는 훌륭했다. 그러나 21세기의 < 그림 형제 >와 < 타이드랜드 >, <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은 기괴한 미장센만 남긴, 몽상에 그치고 말았다. 나이 든 거장은 이름 없이 사라진 여러 영화를 감독하고  < 주피터 어센딩 >, < 앱솔루틀리 애니씽 > 같은 상업 영화에 조연 출연하며 시간을 보냈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의 주인공 토비(아담 드라이버 분)에게서 ‘현재의’ 테리 길리엄이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0년 전 아마추어 대학생 영화감독 토비는 스페인 시골 마을로 날아가 지역 주민들을 캐스팅하며 리얼리즘적 돈키호테를 완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화로 성공한 현재의 그에겐 아무런 창작의 동력이 없다. 고귀한 기사도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한 돈키호테를 위해 몸을 던져가던 토비는 광고주의 눈치를 보며 영웅을 소비한다. 말쑥한 차림에 부와 명성을 거머쥔 그에게 ‘기사도를 세워야 한다’는 돈키호테의 낭만은 과거의 추억에 머무른다.

옛 생각에 다시 찾은 영화 속 마을은 많은 것이 변했다. 평화로운 스페인 남부 시골 동네를 소설 속 한 장면으로 각인해두고 떠난 미국인들 때문에 주민들은 결코 다시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험 팔기 좋은 인상’의 구둣방 노인 하비에르(조나단 프라이스 분)는 그 날 이후 돈키호테로 10년을 살아왔다. 좁은 관광 마차 안에서 갑주를 챙겨 입은 라만차의 기사는 충직한 심복 산초와 함께 기약 없는 모험을 떠날 날만을 기다려왔다. 휘황한 기사도와 환상, 착각의 세계를 사는 하비에르는 우여곡절 끝에 쫓겨온 토비를 산초로 삼아 광활한 대지로 향한다. 충직한 군마, 로시난테를 타고서.



17세기의 돈키호테는 왜 21세기 문명의 시대에 기사도를 논하는가. 테리 길리엄의 작품답게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어지럽게 뒤섞고, 가상과 현실을 마구 오간다. 영화 속 액자 구조와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초현실적 전개는 돈키호테가 그토록 증오하는 ‘마법’을 연상케 한다. 묘한 것은 극이 진행될수록 분명 허구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하비에르 영감과 토비는 영화 속 10년 전의 영화처럼 리얼리즘 스타일처럼 선명해지는데, 현실의 인물들은 환상의 거인 혹은 마법사처럼 흐릿해진다는 점이다.

하비에르와 토비를 맞이하는 모로코 불법 이민자들의 마을엔 가톨릭 종교 재판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주민들은 무슬림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정도로 봉건적 질서 아래 놓여있다. 자본의 눈치만 보는 광고주와 그의 색정적인 아내는 토비에게 모든 것을 맡길 뿐이다. 한 술 더 떠 광고를 의뢰한 러시아 보드카 재벌은 중세 시대 재현에 푹 빠져, 스페인의 거대한 성을 개조해 광고주와 출연 배우들 전체를 분장시켜 한 편의 거대한 돈키호테 연극을 꾸미고자 한다.

이렇듯 허황된 마술사들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 ‘불가능한 꿈을 좇아’ 풍차에 돌격하는 하비에르 영감은 천진하지만 절박하다. 토비의 캐스팅 전까지 그는 자본의 세계에서 뒷전으로 물러난, 조용하고 늙은 구두장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기사의 규율을 지키고 문학을 사랑하며, 정의와 사랑을 수호하는 기사 돈키호테가 된 지금은 자연과 원시로 들어가며 오히려 현실 속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된다.

속물 감독이 된 토비는 하비에르를 부정한다. 그러나 과거 영화 속 둘시네아 공주 배역의 안젤리카(조아나 리베이로 분)를 만난 후, 열정과 꿈으로 가득했던 초짜 시절의 낭만이 점차 기억의 경계선을 침범한다. 토비의 달콤한 말에 할리우드를 꿈꿨던 공주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냉혹한 현실 앞에 보드카 재벌의 창녀로 전락했다. 몰락한 마을의 좁은 마차 안에서 흑백 DVD만 바라보던 노인은 돈키호테 연극을 현실로 옮겨온 자본가의 달콤한 유혹 앞에 평범한 구두장이, 한 명의 연기자로 되돌아온다. 기사의 충직한 시종 산초는 이제 그 자신이 돈키호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그는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가 된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는 공상의 나래를 꿈꿨으나 충직하지 못했던 테리 길리엄의 고백처럼 들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가 1989년부터 기획되었다는 사실이다. 30년 전 감독은 혼란한 현실 속 환상의 세계를 쫓던 돈키호테에 본인을 투영해, 결코 시들지 않을 본인의 예술 세계를 천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 완성된 2019년의 영화의 메시지는 사뭇 다르다. 감독의 자기 고백 속에는 토비처럼 자본에 매여왔던 과거와 하비에르처럼 늙어버린 현재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는 토비 같은 충직한 산초를 기다린다. 그러나 늙은 기사 돈키호테에겐 산초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둘시네아 공주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는, 무한한 상상과 초현실적 테마를 스크린 위 펼쳐낼 새 시대의 젊은 돈키호테에게 갑주를 물려주어야 한다. 예술가의 정신은 자본의 종속 앞에 당당할 수 있는가.


봉건의 종말 속 기사도를 논하던 소설 속 돈키호테가 차분히 최후를 받아들이듯, 테리 길리엄은 늙은 돈키호테를 살해한다. 동시에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을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를 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새 얼굴의 돈키호테 역시 모든 돈키호테들이 그러했듯,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흉악한 거인’에게 박차를 가해 용감히 돌진한다. 잊힌 기사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슬프고도 차가운 민낯, 사랑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