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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May 24. 2019

증명의 폭력에 맞서는 관찰의 기록

5·18 광주 민주 항쟁의 ‘광수’들을 찾아가는 영화, <김군>


#1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를 생각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그리는 이 다큐멘터리는 처절한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지 않는다. 영화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의 인터뷰와 고고한 자연의 풍경, 황폐한 수용소 잔해의 풍경으로 9시간 30분 동안 절멸과 비극의 몽타주를 그려나간다. 잔잔히 풀밭을 흔드는 바람, 그 위에 서있는 노인의 깊은 주름과 떨리는 말투에서 우리는 닿을 수 없는 과거를 마주하게 된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상화되어 무감각할 지경이었던, 그 악을.



#2
<김군>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 1980년 5월의 광주, 복면의 젊은 사내가 카메라를 험상궂게 내려보는 사진이다. 군사전문가 지만원은 ‘고도의 컴퓨터 분석 프로그램’으로 남자의 얼굴을 분석하여 ‘이 자는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더 이상 5·18 광주를 민주화 운동으로 부르지 않는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광주 시내에 은밀히 진입해 시민을 선동한 결과로 발생한, 무장 폭동으로 명명한다. 그는 수백 명의 사진 속 복면 인물들을 ‘광수’라 새로이 명명한다.

영화는 그 ‘광수’들과 마주한다. 1989년 제5공화국 청문회 영상과 5·18 기념재단, 그 날을 기록한 수백 장의 이미지에 박제된 이름이자 얼굴이다. 40여 년이 흐른 광주 도심 속, 일상을 살아가던 ‘광수’들은 다시 한번 본인들을 증명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잔혹한 탄압 앞에 맞섰던 그 날의 자신은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원이 아니며,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말이다.



#3
강상우 감독의 시선은 담담하다. ‘1번 광수’를 두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이는 지만원과 태극기 부대, ‘광수’로 지목된 그 날의 시민군들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감정을 최소화한다. 인터뷰 과정에서도 감독은 카메라 앞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시선과 시선, 기록과 기록의 파편은 상상과 경험에서 다른 길로 갈라진다. 한 집단은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정치 투쟁과 혐오를 상상한다. 그 날을 경험한 다른 집단은 1980년 실제로 자행된 공권력의 폭력과 생존 본능으로부터의 저항을 상기한다. 가해자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동안 피해자는 망각할 수 없는 상흔에 괴로워한다.

영화는 이념으로 낙인찍은 ‘광수’의 문신을 지우고 ‘시민군’을 마주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보편적인 사회의 소시민들이다. 민주주의도 모르고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자, 굴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쓰레기를 줍던 넝마주이들이었다. 통성명도 필요치 않았고 상호 간의 깊은 우정을 쌓지도 않았다. 무장과 저항의 이유도 거창하지 않다. 단지 나의 친구, 이웃, 가족, 형제가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기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기에 투쟁했을 뿐이다.

시민군과의 인터뷰가 이어지며 우리는 518에 거듭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의식을 목격한다. 몽타주와 몽타주, 이미지와 이미지, 증언과 증언의 흐름은 역사가 단답식 문제로 해결될 수 없음을, 또한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 속에 새겨 놓는다. 언뜻 당연한 명제이나 이를 당연히 여기지 않는 세력이 있다. 상처투성이의 몸을 망각의 검은 옷가지 속에 가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당당히 흉터를 내보이라는 이들이 거리를 점거한다. 광기, 위선, 증오, 다른 의미의 망각은 거대한 하나의 악의식으로 수렴한다.



#4
518은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39년의 시간에도 마치 어제 일처럼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김군>은 ‘1호 광수’의 신원을 증명하고 추적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대신 ‘광수’로 지목당한 이들의 얼굴과 말, 기억을 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마냥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 특수부대원 600명이 광주에 아무런 제약 없이 잠입했다면, 그것은 국방부의 잘못이 아니냐’는 대사로 은연의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1호 광수’는 넝마주이일 수도, 매일 주점에 들러 막걸리 한 잔을 걸치던 대학생일 수도 있다. 다리 밑 거지일 수도 있고 김밥을 나르던 김밥집 딸일 수도 있다. 공수부대와 특전사들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목숨을 잃은 이웃과 형제들을 보며,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었고 그 대가로 잔혹하게 처벌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일각의 주장처럼 ‘성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망각과 기만을 종용하는, 위선자와 악인이 판을 치는 현실을 묵묵히 살아나간다. 본인을 증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한 특수부대원의 낙인을 찍는 그들의 논리는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핀잔과 다를 바가 없다.

5·18을 겪지 않은 세대의 영화가 5·18의 현장을 겪은 이들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다. <김군>은 1980년 5월의 상흔이 40주년을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깊다는 사실을, 과거를 묻어두고 싶은 쪽이 정말 어느 진영인지를 적극적으로 묻고 주장하지 않는다. 차분히 관조하고 깊이 새겨 생각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것에 대해 너무도 많은 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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