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헌 Jul 10. 2019

롱 샷, 즐거운 신데렐라 스토리

코미디, 정치물, 2019년 신세대 감성까지 잡다.


미국 최연소 여성 국무장관 샬럿(샤를리즈 테론 분)은 현직 대통령의 재선 불출마 선언을 듣고 2020년 대선 출마의 마음을 굳힌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태스크포스가 꾸려지고, 이들은 다각도로 샬럿의 선거 이미지를 분석하다 유독 낮은 ‘유머 점수’를 고민한다.


같은 시각,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 기자 프레드(세스 로건 분)는 자신이 다니던 중견 신문사가 거대 언론 재벌에 인수됐다는 사실에 분노해 사표를 쓰고 자진 백수가 된다. 우울한 마음에 친구 정재계 거물들이 총출동하는 호화 파티장으로 향한 프레드, 그곳에서 그는 13살 꼬마 시절 자신의 베이비시터였던 옆집 누나 샬럿을 다시 만난다. ‘노숙자 행색’을 하고 등장한 프레드의 좌충우돌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글솜씨에 흥미를 가진 샬럿은 그를 자신의 ‘연설문 코디네이터’로 영입한다.


<롱 샷(Long Shot)>은 정치물을 배경으로 삼은 2019년의 로맨틱 코미디다. ‘가능성 없는 일’이라는 제목처럼 백수 기자 프레드가 성공한 옆집 누나 샬럿을 만나 성숙하고 성공해가는 ‘남자 신데렐라 스토리’다.


그러나 영화는 적절한 균형 감각과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선입견과 젠더 롤의 함정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간다.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SNL)를 연상케 하는 고감도 코미디물, 2019년의 미국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신세대의 신데렐라 러브 스토리. 어떤 시각으로도 <롱 샷>은 평균 이상의 만족을 안겨준다.


오피스, SNL로의 롱 샷



세스 로건과 댄 스털링은 검증된 코미디 조합이다. 성역 없는 풍자와 거침없는 19금 농담으로 일상 속 모든 것을 웃음의 대상으로 희화화하는 세스 로건은 할리우드가 공인한 ‘루저 코미디’의 일인자다.


<롱 샷>의 공동 작가 댄 스털링도 만만치 않다. 악명 높은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와 공전의 히트 시트콤 <더 오피스>가 그의 작품이다. 둘의 스크린 첫 만남은 발칙하게도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를 암살하여 전 세계적 화제를 모은 영화 <인터뷰(The Interview)>였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백악관과 거대 언론사, 지구촌 곳곳을 여행하는 <롱 샷>이 SNL 단편 에피소드의 모음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진지한 장면, 작정하고 망가지는 장면 가리지 않고 매설해 둔 웃음 지뢰가 곳곳에서 터진다.


소위 ‘미국식 개그’기에 국제 역학과 현시대 이슈, 미국 연예계에 박학한 개그가 쏟아진다. 임기를 마치고 배우로의 새 삶을 꿈꾸는 현 대통령 챔버스 (밥 오덴커크 분)가 ‘TV에서 스크린으로 성공한 배우는 조지 클루니와 우디 해럴슨뿐이다’라며 자조하고, 이를 들은 프레드가 제니퍼 애니스턴의 이름을 추가하는 샬럿의 비서에게 ‘영화에 나왔다고 스크린으로 성공한 건 아니다’라며 맞받아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샬럿의 해외 순방 에피소드는 각각 단편 코미디 에피소드로 발표해도 좋을 정도다. 추레한 운동복 대신 우스꽝스러운 스웨덴 전통 의상을 입은 프레드가 불만을 터트리다 ‘한 번만 더 그러면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내버릴 거야’라는 샬럿의 말에 잠잠해지고,  베트남 공항에 도착한 프레드가 의장대에게 ‘50년 전 이 나라에서 한 짓(베트남 전쟁)은 미안합니다’라 속삭이는 장면 등이 폭소를 자아낸다.


정치극으로의 롱 샷



<롱 샷>의 균형을 잡는 인물은 댄 스털링과 함께 공동 작가를 맡은 리즈 한나다. 그는 2017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실화 기반 정치 / 언론 영화 <더 포스트(The Post)>의 시나리오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된 인물이다. 덕분에 <롱 샷>은 마냥 웃음만 추구하는 코미디 극을 넘어, 정치인과 언론사의 결탁과 권력 암투를 꽤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몰입을 돕는다. 그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살짝 암시하는 것은 덤이다.


대통령 챔버스와 거대 언론 재벌 파커 웸블리(앤디 서키스 분)의 관계는 도널드 트럼프와 ‘비공식 백악관 대표 채널’ 폭스(FOX)를 연상케 한다. ‘미 남부 허리케인은 동성애 때문이다’라는 가짜 뉴스로 미 남부 바이블 벨트를 결집시켜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간판 토크쇼를 통해 여성 정치인으로의 샬럿을 폄하하는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이라는 설정에서부터 2016년 트럼프와 격돌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겹친다. 심지어 샬럿을 마음에 두고 있는 젊은 캐나다 수상 제임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현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를 모델로 했음이 분명하다.



샬럿의 핵심 공약은 환경 보호를 위한 국제적 기후 협약으로 묘사된다. 16세 학생회장 선거 때부터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샬럿이 ‘미국의 국익’ 대신 ‘푸른 지구별’을 살리기 위해 불리함을 감수하고도 세계를 순회하는 장면은 빌 클린턴의 부통령이자 2000년 조지 워커 부시에게 아깝게 패한 앨 고어의 환경 사랑을 연상케 한다. 역설적으로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의 25%를 줄이기로 했던 파리 기후협약에서 2020년 탈퇴를 선언한 바 있다.


단순 인물 묘사를 넘어 정치와 신념으로 분열된 미국인들의 일상에 화합의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진보 성향의 저널리스트 프레드는 형제처럼 여기는 흑인 친구 랜스(오셔 잭슨 주니어 분)가 공화당 지지자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공화당 철학으로 나를 위로하다니 어이가 없다’며 황당한 분노를 내뱉는데, 이때 랜스는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 했던 거야. 넌 너무 선입견에 빠져있어.’라며 편협한 프레드를 질책한다. 한바탕 웃고 넘길 수도 있지만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로맨틱 코미디로의 롱 샷



백수 기자에서 대통령 영부군으로 인생 역전을 이루는 프레드만 보면 <롱샷>은 성별이 바뀐 <귀여운 여인>이자 <노팅 힐>의 미국 버전에 가깝다. 험난한 세계 순방, 연설문 작성 과정에서 가까워지는 샬럿과 프레드는 대통령 후보와 저널리스트라는 직책을 벗어던지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프레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샬럿은 딱딱한 정치 인생 속 즐거움과 인간적인 면모를 회복한다.


대개 이런 ‘신데렐라 스토리’는 남성이 위고 여성이 아래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 능력 있는 캐릭터로 그려질 때도 문제의 해결 방법은 주로 남자 주인공의 지위에 맞춰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설정된다. 관습대로라면 샬럿은 남루한 저널리스트 프레드와의 사랑을 위해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하거나, 대통령 출마 선언 때 급작스럽게 등장한 프레드의 진심 어린 고백에 감동을 받아 연인 관계를 인정하는 방향이 예측된다.



<롱 샷>은 이런 대중문화 속 클리셰를 과감히 비튼다. 국무장관 샬럿은 ‘여성’과 ‘젊은’이라는 수식 없이도 당당한 소신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프레드를 팀에 영입하고 일을 맡기는 모든 부분에서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철없는 프레드가 사랑을 깨닫고 성숙하는 과정에서도 샬럿의 굽히지 않는 카리스마와 환경에 대한 깊은 신념이 큰 역할을 한다. 결정적으로 샬럿은 프레드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프레드를 통해 지지율을 굳건히 다지고 진실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 과정에서 프레드도 마냥 무능력한 캐릭터로 그려지지 않는다. 비록 여러 사고를 치고 선입견이 강하지만, 보수적인 샬럿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비전을 일깨우며 로맨스를 이끌어간다. 극 초반 샬럿의 단점으로 지적된 ‘유머 감각’을 포함, 연설문을 만드는 능력 역시 훌륭하다. ‘당신의 마릴린 먼로가 되겠다’며 숨겨진 연인도 괜찮다는 깊은 고백은 덤이다. 샤를리즈 테론과 세스 로건의 훌륭한 연기, 극본가들의 균형감각이 <롱샷>을‘ 바람직한 21세기형 신데렐라 스토리’로 만든다.


이건 덤으로, 음악으로의 롱 샷



<롱 샷>의 매력 포인트로 적재적소의 음악 선곡이 빠질 수 없다. 보컬 그룹 보이즈 투 멘과 래퍼 릴 야티는 실제로 극에 출연하여 현실감을 더한다. 블론디,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언급하는 샬럿과 달리 프레드는 찰리 XCX, 드램(DRAM)과 같은 현세대 힙합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선호하며 캐릭터를 구분 짓는다. 이 커플의 로맨스를 상징하는 곡은 스웨덴 팝 그룹 록시트(Roxette)의 ‘It must have been love’인데, 앞서 언급했던 1990년 <귀여운 여인>에도 등장한 바 있어 묘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둘의 취향이 겹치는 또 다른 곡은 래퍼 투 체인즈(2 Chainz)의 히트곡 ‘Birthday song’이다. ‘내 생일날 원하는 건 큰 엉덩이뿐(All I want for my birthday is a big booty ho)’라는 가사를 ‘직관적이라 좋다’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사회에서는 ‘큰 가슴’으로 번역했던데, Booty는 엉덩이를 뜻하는 속어다.


Roxette - It must have been love
매거진의 이전글 지상에서 지상으로, 어나더 컨트리는 어디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