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 기획사, 걸그룹, 팬덤을 인질로 잡은 방송사
엠넷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 퀸덤 >의 첫 화. 프로그램 기획안을 전달받은 걸그룹 들은 느닷없는 ‘참전 요구’에 당황한다. ‘진짜 Girls on top’, ‘계급장 뗀 K-POP 걸그룹들의 본격 대전이 시작된다’ 같은 부담스러운 구호가 범람하지만, 왜 이들이 방송사의 ‘컴백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지는 도대체 알 길이 없다. AOA 매니저가 < 언프리티 랩스타 > 출연 경력이 있는 지민에게 ‘너 전문이잖아, 컴페티션’이라며 참여를 독려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 싫어’다.
< 퀸덤 >은 당위가 없는 경쟁이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여자)아이들, 마마무, 러블리즈, 오마이걸, AOA, 박봄이 왜 한 날 한 시 싱글을 공개하고 세 차례의 경연을 거쳐야 하는지 이유가 없다. 데뷔 2년 차의 아이들을 제외하면 제법 연차가 쌓인 팀들인 데다 박봄은 솔로로 출연한다. 오마이걸 효정의 설명처럼 ‘따로따로 컴백해서 1위에 오르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팬들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다.
순위를 매기는 방식 역시 잔인한 데다 의심스럽다. ‘우리 팀보다 못했다고 생각되는 한 팀’을 고르는 자체 평가, < 프로듀스 X >에 출연했던 연습생들의 스페셜 평가가 병행된다. 출연 걸그룹 들은 동료이자 친구인 상대를 깎아내려야 할 뿐 아니라 회사 후배 혹은 타사 연습생들에게 무대를 평가받는 신세다.
1차, 2차 경연에서 최하위로 떨어진 그룹은 아예 방출되어 최종 경연에 나올 수도 없다. 관객 평가단 투표가 총 1만 점 중 7000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최근 < 프로듀스 > 시리즈 투표수 조작 의혹으로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고 있는 회사를 신뢰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요약하자면 < 퀸덤 >은 음악방송 정상에 오른 경력도 있고 어느 정도 팬덤도 구축한 팀들에게 컴백 전쟁과 서바이벌의 이중고를 강요하고 팬덤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엠넷 입장에서는 이런 모순적인 방송을 기획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슈퍼스타 K >, < 쇼미더머니 >, < 프로듀스 >로 이어지는 엠넷의 음악 서바이벌 시리즈가 이미 가요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덕이다.
특히 아이돌 시장에서 그 힘은 더욱 강하다. < 프로듀스 > 시리즈는 기획사들로부터 연습생들을 수급받아 시청자 투표로 경쟁을 유도해 수익을 올리고, 그 결과로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을 운영, 홍보하며 다시 한번 막대한 부를 획득하는 포맷을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웬만한 연예기획사들조차 방송사의 하청 업체로 전락했다. 케이팝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의 경쟁을 담는다면서 3대 기획사 소속인 트와이스, 있지, 레드 벨벳, 블랙핑크는 출연하지 않는다. < 아이돌학교 >로 결성된 프로미스나인, CJ 계열사가 된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의 구구단도 볼 수 없다.
출연 걸그룹들의 소속사들은 모두 < 프로듀스 > 시리즈에 연습생들을 출연시킨 이력이 있는 데다 그들이 현재 활동 중인 아이즈원과 엑스원 멤버인 곳도 있다. 러블리즈의 울림 엔터테인먼트는 아이즈원 권은비, 김채연과 엑스원 차준호, 오마이걸의 WM 엔터테인먼트는 아이즈원 이채연의 소속사다.
그럼에도 이렇게 방송에 출연하면 화제가 되니 포기할 수 없다.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9월 2일 발표한 8월 5주 차 ‘TV화제성 순위’에서 < 퀸덤 >은 비드라마 순위 화제성 1위에 올랐다. 9월 4일 CJ ENM과 닐슨코리아가 발표한 8월 다섯째 주 콘텐츠영향력평가지수(CPI)에서도 tvN 드라마 < 호텔 델루나 >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박봄의 ‘You and i’ 경연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263만 건을 기록했다.
더는 아이돌 노래가 음원 서비스 차트 1위에 오르지 못하는 시대에 소속사들은 미디어의 조명에 더욱 목을 맨다. ‘스밍 총공’이 과거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 실물 앨범 소비를 늘리는 팬덤 역시 마찬가지다. 울며 겨자 먹기로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시청자 투표를 독려하여 어떻게든 ‘나의 그룹’에게 정상의 자리를 안겨야 한다. 방송사가 가요계와 가수는 물론 팬덤까지 인질로 잡은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룹의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바로 ‘최선을 다해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의 히트곡과 팀을 대표하는 노래를 급박한 촬영 스케줄 속 추가로 소화하며, 연습생 시절 겪었던 피나는 경쟁에 다시금 뛰어든다. 허물없이 지내던 그룹들과 ‘계급장을 떼고’ 신경전을 벌이는 과정은 악마의 편집과 자극적인 진행으로 비화되어 팬덤 간 다툼을 유발한다. 누구도 원하지 않은 ‘전쟁’을 붙인 방송사만 좋다. 지민의 대답대로, 너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