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티 플레저, 이제는 안녕.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동안 지켜왔던 신념만 믿고
다른 음악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상술이라 믿었지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네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 설리에게 빠져 있기 때문에
-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알앤비’ -
에프엑스는 내 십 대 시절의 길티 플레저다. 좋은 음악, 위대한 음악, 명예로운 음악이라는 호칭에 집착하며 허세를 부리다가도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프엑스의 무대를 보면 마냥 좋았다. 그중에서도 설리는 뭐랄까, 상징적인 존재였다. 에프엑스의 다섯 멤버들 모두 빛이 났지만 화제의 중심은 항상 설리였다. 밝고 행복한 설리의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새벽 여섯 시 한 시간 걸려 학교를 가던 우울한 고등학생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스무 살이 되자 설리와 에프엑스를 숨어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이가 됐다. 이에 화답하듯 그들은 <Pink Tape>라는 명반을 냈고, 갓 글을 쓰기 시작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해석했는데 운이 좋아 위키피디아에 이름이 오르게 됐다. 마냥 기뻤고 행복했다. 무대 위 설리도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설리는 에프엑스를 떠난 후 너무 많은 것을 짊어져야 했다. 그룹 활동 말미부터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지만 에프엑스를 탈퇴하고 나서는 대중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귀여운 그룹 막내에 머무르기엔 너무도 자유롭고 할 말 많은 인물이었던 설리는 사진 몇 장, 인스타그램 게시물 몇 개 만으로 사회에 논란을 불러왔다. 개중 다수는 ‘인스타 노출’, ‘3초 삭제 사진’ 같은 음침한 욕망으로 그를 소비하기에 바빴다. 설리는 그렇게 조용히 나에게 길티 플레저로 돌아가버렸다.
2017년 종현이 세상을 떠난 12월 18일은 나의 생일날이었다. 아티스트에 대해 이런저런 문장을 늘어놓는 나는 해방촌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정작 그 아티스트는 누구에게도 우울을 말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종현의 사망 소식과 케이팝의 헝거게임을 엮어 글을 쓰면서 ‘태도 논란과 스캔들로 에프엑스를 탈퇴한 설리는 소속사에 잔류했음에도 언론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라는 문장을 눌러 적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도 있었던 것 같다. 내 사춘기 시절의 길티 플레저는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해줄 수 있는 위로는 이것뿐이었다.
시선에 아랑곳 않고 설리는 부지런히 하고픈 말을 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상점을 차렸을 때도, 솔로 앨범을 발표했을 때도,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플을 읽어나갈 때도 나는 조용히 그를 보고 그를 읽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잘못이었다. 설리는 길티 플레저가 아니어야 했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지지받고 응원받으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마음속으로만 응원하고, 네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잘못된 거라는 말을 하는 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가길. 오보이길. 그렇게 마지막까지 부질없는 고민을 했다. 속절없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연관 검색어로 등장하는 ‘설리 라이브 노출’, ‘설리 최자’, ‘설리 노출’에 구역질을 느꼈다. 몇 달 전 첫 솔로 곡 ‘고블린’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짝 내비친 것도 뒤늦게 머릿속을 휘저어댔다. 부끄러운 건 그런 위태로운 사람을 마음속으로만, 깊은 곳에서만 응원하고 지지했던 나일 것이다. 이 나라는 여성 연예인에게 너무도 잔혹하다.
설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가끔은 그들이 나인가 싶기도 하다.
그냥 다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왜 나는 설리가 버티고 굳건히 서있기를 바라기만 했을까. 설리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는데 나는 그를 숨겼다. 그렇게 침묵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그를 소비했고, 그를 욕망했으며, 종국에 그를 죽였다. 티 내지 못해도 응원하고 있었고 고마워하고 있었다는, 그래서 슬퍼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어떤 트윗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아마 내가 숨기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나는 또 이런 의미 없는 추억을 팔며 손 잡아주지 못했던 걸 후회하겠지.
혼자 견디게 해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