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의 새로운 모델, 빌보드 차트의 함정
SM 엔터테인먼트의 프로젝트 그룹 슈퍼엠(SuperM)이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 지난 10월 4일 발매된 슈퍼엠의 데뷔 미니 앨범 <SuperM>이 발매 첫 주에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최초의 케이팝 그룹이자 방탄소년단 이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두 번째 케이팝 그룹이다. 슈퍼엠은 샤이니 태민, 엑소의 카이와 백현, NCT의 태용과 마크, 중국 그룹 WayV의 루카스와 텐이 모인 7인조 그룹으로, ‘케이팝 어벤저스’라는 야심 찬 타이틀을 내세웠다.
슈퍼엠은 SM과 미국의 초대형 레이블 캐피털 뮤직 그룹(Capitol Music Group)의 연합으로 탄생했다. 1942년 캐피털 레코드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비틀즈 및 폴 매카트니, 밥 딜런 등 저명한 록 뮤지션들은 물론 케이티 페리와 같은 팝스타, 1960년대 흑인 음악의 전설적인 회사 모타운 레코즈(Motown Records)를 보유하고 있다. SM이 계약한 회사는 캐피털 뮤직 그룹 산하의 캐롤라인(Caroline) 레이블이다.
지난 8월부터 예고된 이 프로젝트는 여러 모로 케이팝 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델이다. 캐피털은 유통과 홍보만을 담당할 뿐, 그룹 프로듀싱의 권리는 SM에 있다. 캐피톨은 한국을 대표하는 연예기획사 SM의 노하우를 가져와 미국 시장 진출을 돕고, SM은 오랜 염원이었던 미국 진출에 있어 거대 음반 회사의 도움을 받아 보다 수월한 시장 진입이 가능해졌다. 해외 레이블이 케이팝 산업을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로 인정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실제로 슈퍼엠의 최초 공개 행사는 현지시각 3일 미국 로스엔젤레스 할리우드의 캐피털 레코즈 본사에서 개최됐으며 이틀 뒤인 5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쇼케이스 콘서트를 열었다. 미국 주요 라디오 채널에서 타이틀곡 ‘Jopping’이 흘러나왔으며 유명 토크쇼 더 엘런 쇼(The Ellen Show)에서도 무대를 가졌다.
이들은 상반기 부진한 실적에 주춤하고 중국 시장에서 예와 같은 영향력을 잃었으며, 방탄소년단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긴 SM이 던진 강력한 승부수다. 여기에 20년 전부터 해외 진출을 도모했던 이수만 프로듀서의 의지가 깊이 새겨진 그룹이기도 하다.
슈퍼엠의 음악에는 SMP(SM Music Performance)라는 이름으로 브랜드화한 SM 특유의 어둡고 거칠며 파괴적인 사운드, 비장한 퍼포먼스가 집약되어있다. 그리고 이들은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미국 시장에 SM이라는 브랜드를 소개하고 확장하겠다는 기획사의 의도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성공 과정을 뜯어보면 이들의 성공을 ‘케이팝의 세계화’ 라거나 ‘미국 시장에서 주류가 된 케이팝’이라 극찬하긴 어려워진다. 슈퍼엠의 성과는 SM 엔터테인먼트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등극을 위해 철저히 기획한, 팬덤 타깃의 비즈니스 마케팅의 성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갈수록 힘을 잃어가는 실물 음반 시장과 빌보드 앨범 차트의 현실이 있다.
‘빌보드’가 밝힌 슈퍼엠의 실물 앨범 판매 점수는 16만 8천 점으로 이 중 16만 4천 점이 실물 앨범 판매량이다. 실물 앨범 판매가 저조한 미국 음악 시장에서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앨범들은 대부분 스트리밍 점수가 훨씬 높다. 지난주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래퍼 다베이비(Dababy)의 <Kirk>는 빌보드 14만 5천 점 중 8천 점 만이 실물 앨범 판매량이었다. 대신 다베이비는 첫 주 1억 8천만 건 이상의 스트리밍 횟수를 통해 앨범 점수를 쌓았고, 빌보드 싱글 차트 20위 권 내 3곡을 진입시켰다.
슈퍼엠의 경우 실물 앨범 판매고에 비해 스트리밍 차트와 싱글 차트에서의 순위는 신통치 못하다. 빌보드 싱글 차트의 새로운 척도로 자리한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 차트에서 ‘Jopping’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아이튠즈 글로벌 차트에서도 5위에 오르는 데 그쳤다. 올해 방탄소년단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가 스포티파이 글로벌 톱 200 차트에서 3위에 오르며 빌보드 싱글 차트 8위에 오른 것과 대조된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슈퍼엠에 밀려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 오른 신예 여성 가수 섬머 워커(Summer Walker)와의 수치를 비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섬머 워커의 데뷔 앨범 <Over It>은 발매 첫 주 미국에서만 1억 5천만 건의 스트리밍 횟수를 기록하며 여성 R&B 가수 중 최고 수치를 경신했는데 빌보드 실물 앨범 판매 점수는 13만 4천 점으로 집계됐다. 실물 판매 점수가 1만 4천 점에 그친 탓이다.
‘빌보드’ 지는 슈퍼엠의 차트 1위 소식을 다루며 60종의 관련 상품(머천다이즈)과 앨범 번들, 8종의 디자인으로 구성된 각 앨범과 LA 팝업스토어 등 다양한 판매 루트를 소개했다. 슈퍼엠의 이름으로 발매되는 공식 기념품을 구매한 팬들은 구성품에 포함된 미니 앨범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 11월 11일부터 총 9회로 진행되는 북미 투어 티켓에도 실물 앨범이 번들로 포함된다. 슈퍼엠은 지난 8월부터 공식 홈페이지의 슈퍼엠 온라인 매장을 통해 다양한 머천다이즈 번들링을 선보이며 앨범 판매 집계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번들링 판매는 실물 음반 판매가 저조한 현 팝 시장에서 유명 아티스트들은 물론 인디 아티스트들까지 자주 활용하는 보편화된 판매 전략이다. 앨범 커버를 멤버 별로 다르게 하여 판매하는 전략도 케이팝 아이돌 음반 판매의 익숙한 전략이다.
다만 이런 전략이 인기 차트를 교란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뉴욕 타임즈’는 슈퍼엠의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소식을 다루며 60가지 이상의 번들 판매를 언급하고, ‘이와 같은 전략은 흔해지는 추세이지만, 주간 차트를 교란한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슈퍼엠의 앨범을 SM 글로벌 샵에서 구매할 경우 배송지 주소와 상관없이 빌보드 앨범 판매량에 집계된다. 국내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슈퍼엠의 앨범 역시 캐피털 레코드에서 발매하는 ‘해외구매’로 국내에는 정식 발매되지 않은 상태다. 트위터의 ‘슈퍼엠 빌보드 정보봇’은 ‘정확한 차트 반영을 위해’ 한국 직배송 대신 미국 배송대행지를 이용한 구매를 강조하고 있었다. 국내 팬덤의 앨범 소비가 빌보드 차트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캐피털과 SM 엔터테인먼트는 케이팝의 실물 앨범 판매 전략을 조직적으로 구성해 보편적인 팝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도 슈퍼엠과 SM 팬덤에게 판매를 독려하여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거머쥔 것이다. 대규모 팬덤을 동원할 수 있는 케이팝 기획사들의 익숙한 빌보드 진출 방법이다.
이런 전략을 통해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차트 첫 주에 높은 순위로 데뷔하지만, 팬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성적이 북미 시장의 호응으로 이어지지 않아 그다음 주 큰 하락세를 보인다. 올해의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방탄소년단은 몇 번의 차트인을 통해 북미 시장에서 스트리밍 시장에 안정적으로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슈퍼엠의 성공은 한국의 거대 기획사 SM의 팬덤 동원 능력이 현재 미국 차트에서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증명했다. 캐피털 레코즈 입장에서도 날로 줄어가는 실물 앨범 판매 시장에서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릴 수 있으니 호재이며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가는 빌보드 차트 역시 케이팝 팬덤의 적극적인 소비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해외 케이팝 팬덤에게 ‘Jopping’의 강력한 퍼포머스를 각인하며 SM의 모델을 소개했다는 점도 의미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 ‘케이팝의 세계화’, ‘한류 열풍’이 불어닥친다는 식의 낙관적인 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음반 시장의 흐름 속 케이팝 모델이 차트의 빈 틈을 잘 파고든 것이지, 미국에 케이팝이 유행이라 해석하는 것은 섣부르다. 인위적인 수치에 경도된 '글로벌 케이팝'을 보다 냉철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