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 신드롬으로 2020년 온라인 최고의 화제가 된 가수 비
2003년 개봉한 ‘더 룸(The Room)’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망작(亡作)이다. “못 만든 영화계의 < 시민 케인 >”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평가에 과장은 없다. 구멍투성이의 시나리오,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대본, ‘발연기’로 일관하는 배우들과 엉성한 세트장까지 모든 부분이 실패다.
‘더 룸’이 실패한 건 각본, 제작, 감독, 주연을 모두 도맡은 신비로운 인물 토미 웨소(Tommy Wiseau)의 고집 때문이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을 흠모하던 그는 대작을 위해 6백만 불에 달하는 거금의 제작비를 들여 세기의 명작을 꿈꿨으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괴작을 유도했다.
토미가 골방에 틀어박혀 써내려 간 시나리오는 아무 의미 없는 맥거핀과 개연성 없는 전개로 가득했고 질 낮은 성적 농담과 베드신이 과도할 정도로 많았다. 대부분 제작비는 촬영 카메라를 대여하는 대신 구입, 그것도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를 둘 다 구입하고 쓸데없이 세트장을 짓는 데 낭비됐다. 연기도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명배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실제 촬영장에서는 간단한 몇 문장도 외우지 못했고, 힘겹게 담은 필름 속엔 부정확한 발음과 과장된 표현, 슬랩스틱에 가까운 몸동작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못 만들어서 유명해졌다. 대중은 그냥 못 만든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대재앙에 가까운 이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 씬 하나하나가 분할되어 인터넷 밈(Meme)화되었고 토미의 우스꽝스러운 연기에 셀 수 없이 많은 패러디가 쏟아졌다. ‘스타 워즈에 출연한 토미 웨소’, ‘다크 나이트 조커로 분한 토미 웨소’ 등등… 웨소가 의도한 히치콕의 심오함 대신 대중은 기이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엉성함(?)에 빵 터졌다.
‘더 룸’은 2020년 지금까지도 미국 전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되는 ‘더 룸 상영회’를 통해 스크린에 오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룸’의 팬들은 이 영화만을 운영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표를 예매해 극장을 꽉 채우고 한없이 진지한 이 졸작을 보며 배를 잡고 웃는다. 토미 웨소는 이 영화를 ‘현대 사회에 맞서는 풍자극(?)’이라 소개하며 미국 유명 토크쇼에도 얼굴을 비췄고, 2017년에는 영화의 주연 배우 그렉 세스테로가 쓴 자서전 ‘더 디재스터 아티스트’ 판권을 유명 배우 제임스 프랭코가 구입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아침 먹고 깡, 점심 먹고 깡, 저녁 먹고 깡,
하루 3 깡 정도는 해야죠.”
지난 16일 MBC TV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한 비에게서 토미 웨소와 ‘디재스터 아티스트’가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017년 발표한 그의 15주년 데뷔 앨범 < MY LIFE愛 >의 타이틀곡 ‘깡’은 유튜브 채널 ‘호박전시현’이 업로드한 ‘1일 1 깡 여고생의 깡(Rain-gang) 커버’ 영상으로 온라인 상에서 주목받으며 3년이 지난 지금 제일의 유행이 됐다. 2017년 공개된 ‘깡’ 뮤직비디오가 5월 23일 현재 유튜브에서 983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천만 조회를 앞두고 있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깡 패러디’를 양산 중이다.
‘깡’은 여러 부분에서 ‘더 룸’과 유사하다. 유튜브 ‘깡’ 영상에는 자만 가득한 노랫말과 비의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비꼬는 댓글이 웃음을 자아낸다. 비가 스스로 짠 안무는 구시대의 유행으로 기괴하여 ‘꿈에 나올까 봐 무서운’ 수준이다. 시작부터 ‘12만 원 (Hundred Dollar Bill)’을 애타게 찾다 ‘후배들 바빠지는 중!’이라 선언하다 ‘허세와는 거리가 멀어’라 갑자기 겸손해지고,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라 감미로워지는 부분에서는 그 ‘화려한 조명’조차 ‘저는 비를 감싼 적이 없습니다’라 토로할 정도다. ‘댓글을 보러 영상을 본다’는 말이 이해될 정도로 매번 기발한 조롱과 탄식이 댓글란을 채우는데 슬프게도 그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비와 토미 웨소도 닮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8년 JYP 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한 후 본격적으로 본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비와 공통점이 있다. 몇 년 간은 ‘레이니즘’, ‘널 붙잡을 노래’ 등 괜찮은 퀄리티의 곡과 퍼포먼스로 ‘태양을 피하는 방법’, ‘It’s Raining’ 시절 쌓아놓은 인기를 잘 유지했지만 어느새 그를 감싼 건 ‘화려한 조명’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이었다. 2014년 방송사 엠넷(Mnet)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개된 6집 앨범 ‘Rain Effect’ 작업 과정에서의 비는 토미 웨소처럼 고집과 독선의 제작 과정, 월드스타의 자부심에 가득 취한 모습이었다.
한 때 ‘타임 100’ 리스트에 아시아인 최초로 이름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비는 2010년대 중반 들어 급격히 ‘디재스터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다. 2014년 ‘Rain Effect’의 '30 Sexy', ‘La Song’, ‘어디 가요, 오빠’ 등의 우스꽝스러운 노래들은 평단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조롱의 대상이 됐다. 설상가상 2019년 150억을 투자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까지 누적 관객수 17만 명에 그치며 실패했다. 그에게 남은 건 실패한 영화의 기준을 표현하는 ‘UBD(엄복동의 약어)’라는 새 단어뿐이었다. 이렇게 못 만들기도 쉽지 않은 작품들이 연거푸 세상에 나왔다.
대중은 냉정했다. 3년 전 발매와 동시에 '깡'은 거의 모든 평단과 팬들에게서 낙제를 받았다. 현재 ‘깡 신드롬’의 기본도 못 만든 콘텐츠에 대한 반성과 조롱이다. 모 네티즌이 유튜브에 댓글로 작성한 ‘비 시무 20조’는 그동안 비가 옳은 것이라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뼈아픈 직언을 날리고 있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기, 자아도취 금지’, ‘프로듀서에 손 떼기’, 가사에도 손 안대기’… ‘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대중은 인자하다. ‘깡’은 만듦새로는 실패지만 너무도 정교하게 허술한 작품이라 일단 웃기는 데는 성공이다.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 딱 좋은 콘텐츠다. 개봉 17년이 지난 ‘더 룸’을 지금까지 스크린에 올리는 것처럼, 왕년의 월드 스타를 기억하는 팬들은 2017년 발매와 동시에 사형 선고를 받은 ‘깡’에게도 유튜브와 밈의 힘을 통해 다시 한번의 기회를 줬다. 5월 4일 통계청이 '깡' 뮤직비디오에 어설픈 'UBD' 댓글을 달자 '개인의 실패를 공공기관이 조롱해선 안된다'는 따스함으로 아티스트를 감싸기도 했다. 비에게는 감동이다.
‘디재스터 아티스트’의 마지막 장면, 시사회장에서 박장대소하는 관객들에 분노한 토미 웨소(제임스 프랭코 분)는 실망하며 극장을 뛰쳐나간다. 이에 따라 뛰어나온 그렉 세스테로(데이브 프랭코 분)가 토미를 붙잡으며 이런 위로를 건넨다. “네 영화를 보며 사람들이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자 금세 의기양양해진 토미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관객들 앞에 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저의 ‘코미디’ 영화에 이렇게 열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비에게는 희화와 조롱의 댓글도 즐겁다. 타고난 엔터테이너인 그는 트렌드에 뒤쳐졌을지 몰라도 대중에게 즐거움을 안길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깡’이 유행하면 유행할수록 2000년대 그의 전성기가 재발견되고 향후 활동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이것이 그가 ‘놀면 뭐하니?’에서 짓궂을 수 있는 질문에 능청스레 대답하며 감사를 표한 이유다. 동시에 화려했던 전성기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실력만큼은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시무 20조’에 협상을 시도하는 장면은 아찔했지만.
‘깡’은 코미디와 밈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다. 이제 비가 ‘깡’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차례다. 지금이야 ‘1일 1 깡’에 모두가 ‘바빠지는 중’이지만 자신의 진지한 작품이 ‘코미디’로 취급받는 것에 기분 좋을 아티스트는 없다. ‘놀면 뭐하니’ 중 농담 삼아 ‘화려한 조명만큼은 양보 못한다’고 말했던 비에게 필요한 건 역으로 그 화려한 조명을 벗어나 2020년의 인간 정지훈을 정확히 응시하는 것이다.
고맙게도 팬의 ‘시무 20조’에 ‘현재 2020년 현실을 직시하기’가 있다. 비가 이 곡으로 반등하여 그를 모르는 세대에게도 월드스타의 면모를 보일지, 혹은 ‘디재스터 아티스트’에 만족하며 토미 웨소의 길을 걷게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때 가요계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던 그가 그저 UBD, '1일 1깡'으로 기억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