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이야깃거리 속 던지는 질문
SM 엔터테인먼트의 새 걸그룹 에스파(Aespa)가 데뷔한 지 13일이 지났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를 초월한, 완전히 새롭고 혁신적인 개념의 그룹”이라 소개했던 에스파는 온라인 속 아바타 ‘아이(ae)’ 멤버들과 함께 무대를 펼치고 상호 교류하는 독특한 콘셉트로 데뷔 전부터 큰 화제를 낳았다. 4차 산업 혁명 시대 미래의 케이팝 산업을 미리 전시한다는 낙관적인 기대부터 인간성을 박탈하는 아바타에 대한 불길한 시선까지, 그들이 숱한 이야깃거리를 가져온 것은 확실했다.
시간이 지난 오늘 에스파의 등장을 다시 돌아본다. 그들의 데뷔곡은 온라인과 현실 세계의 연결, ‘싱크(SYNK)’를 방해하는 존재 ‘블랙 맘바(Black Mamba)’다. 성적이 좋다. 데뷔와 동시에 아이튠즈 글로벌 차트 2위에 올랐고 ‘빌보드 글로벌 차트’에서는 100위로 진입했다. 반면 예고했던 것처럼 온라인 세계 속 ‘아이’ 멤버들이 무대에 대거로 등장하는 일은 없었고, 활동은 현실의 카리나, 닝닝, 윈터, 지젤을 알리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생각보다 낯설기도, 생각보다 익숙하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에스파가 데뷔하던 17일 아침, 네이버 나우(Now.) ‘국봉쇼’에 출연해 에스파와 인공지능, 케이팝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첫인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늦었다’였다. 처음부터 이 팀이 대단히 새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미 우리는 2018년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가 기획한 가상 걸그룹 케이디에이(K/DA)를 통해 아바타, 온라인 게임 캐릭터들의 무대를 지켜본 바 있다. 그 해 증강 현실(AR)을 통해 인천 문학경기장 스테이지에 등장한 케이디에이는 실제 뮤지션들과 호흡을 맞추며 많은 이들에게 생경한 충격을 안겼다.
이수만 프로듀서의 야심 찬 선언에 담긴 ‘AI 브레인’,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획기적 아이덴티티’ 등의 단어들은 과했다. 2017년부터 AI 콘텐츠 사업에 뛰어든 SM이지만 세계 유수 기업들도 까다로워하는 인공지능을 제대로 활용할 것이라는 기대는 적었고, 티저 영상 ‘MY, KARINA’ 속 ‘아이 카리나’의 어색한 완성도는 많은 이들의 반감을 불렀다. 최대의 아웃풋은 케이디에이처럼 증강 현실을 활용하거나 영상에 미리 제작해 둔 영상을 합성하는 정도를 넘지 않았다. 표절 논란은 현재 진행형의 악재다. 영화 < 아바타 >를 연상케 하는 디지털 동산과 지하철 시퀀스, 글리치와 사이버펑크의 티저 영상과 이미지는 팬들이 SM 소속 아트 디렉터의 SNS 계정을 추적하며 레퍼런스라 말하기 어려운 수준의 복제임을 확인시켰다.
그럼에도 에스파는 순조로이 활동 중이다. 주목할 것은 그 핵심에 음악이 있다는 점이다. 20년 전 보아의 ‘ID : Peace B’를 작사한 유영진은 2020년 하반기 최고의 유행 ‘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 '넌 광야를 떠돌고 있어'를 히트시키며 녹슬지 않은 심오한 창의력을 증명했다. 랩 파트 없이 비장한 베이스 리프로 출발해 3분 이내로 간결하게 마무리되는 노래는 과하지도, 허전하지도 않게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와 날카로운 가창으로 단시간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른바 ‘SMP’라 불리는 SM 특유의 음악 스타일을 처음 적용하는 신인 걸그룹인데도 이들의 동작과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묻어 나온다. 그들의 무대를 보면 정말 ‘네게 맞서 난 질 수 없어’ 보인다.
‘Black mamba’와 대결하는 에스파는 선명한 신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아가 분열되어 가상공간의 아바타로 전개될 때, 혹은 확장되어 소속사 전체의 핵심 사업 및 스토리텔링과 연결될 때 그 상(像)은 ‘노이즈같이 보여’ 진다. 네 명은 무대를 꽉 채우지만 아바타 멤버들과 함께 있으면 과시와 선언 아래 빈틈이 거듭 벌어진다. 에스파는 단독으로 빛나지만 SM이 자사 모든 아티스트들을 하나로 묶어 진행하는 ‘SMCU(SM Culture Universe)’ 속에서 그들은 열 번째 정규 앨범으로 컴백하는 보아의 예고편, ‘Make a wish’로 모던하게 뛰어노는 NCT의 후속작이 된다. 동시에 이들은 체계적인 스토리라인과 진행 기틀도 베일에 싸인 기획사의 대서사시에서 출사표의 기능까지 수행해야 한다.
자연히 에스파를 바라보는 시선도 복잡해진다. 그룹을 응원한다고 해서 회사를 응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 회사가 팬덤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라면 더욱 어렵다. SM은 팬덤이 즐길 만한 다채로운 콘텐츠, 열린 소통,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데 있어 소홀하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고 각각 아티스트, 그룹 관리나 디렉팅 면에서도 거듭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에스파만 해도 안이한 아트 디렉팅으로 데뷔 초부터 표절의 눈초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SM이 긴 시간 갈고닦은 저력을 총동원해 만들어낸 그룹이 에스파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Black mamba'가 그렇듯 SM은 재능 있는 멤버 선발, 탄탄한 퍼포먼스, 체계적인 공정을 통해 생산되는 스타일리시한 음악으로 논란을 헤쳐왔다. 그 힘이 보아에게 하여금 20년의 역사를 갖추게 하였으며 '새로운 SMP'로 등장한 샤이니와 에프엑스, 최근의 레드벨벳부터 태민까지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에스파의 경우는 최근 음악보다 서사가 앞서는 소속사의 경향을 따라가며 논쟁을 불러왔지만 음악만큼은 확실히 강점을 가져간다. 회사의 정수이지만 약간의 존속살해 신화를 적용했을 때 더욱 빛날 수 있는 팀이라는 딜레마를 품고 있다.
‘팀의 개성과 정체성은 디스코그라피가 쌓여가며 명확해질 것’이라는 평에 공감하지만 이들을 통해 꽤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SM의 세계관은 좀체 명확해질 것 같지 않다. 하나 확실한 건 아바타와 가상현실, 웅장한 스토리텔링이 이들을 ‘혁신적인’ 걸그룹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희미한 연결고리를 이으려 무리하는 것보다. 대중에게 자연스레 각인된 고유의 개성과 음악 스타일을 정립하여 팬덤에게 유희와 확장의 재료를 제공하는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고 빠르게 납득 가능해 보인다. 이는 SM이 기획사 중 음악에 가장 혁신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일정한 궤적을 남긴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힘을 얻는다.
SM은 에스파를 통해 케이팝의 또 다른 차원을 꿈꾼다. 동시에 '탐욕들을 먹고 자라난' 회사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그룹의 앞날에 '모든 걸 삼켜버릴 Black mamba'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둘이 될 수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확언하기보다 다양한 화두를 던질 수밖에 없다. '아이-에스파'들의 데뷔 무대는 자신만만한 예고에 걸맞을까. 한국 음악계의 마블(Marvel)을 꿈꾸는 유기적인 세계관은 순조로이 작동할까. 찜찜한 SM 마니아들의 시선과 '표절'로 이들을 받아들인 대중, 열광적인 해외 팬덤의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
많은 질문에 대해 몇 가지 사견을 더해본다. 들뜨지 않을 것, 과장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