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얘기
냉전 시대 미소 간의 대립과 배우들의 열연이 빛난 영화 < 스파이 브릿지 >는 1960년대 서베를린의 고립 과정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영문 모른 채로 통행을 제지당한 자유 진영 시민들은 하룻밤 새 포위되었고, 많은 동독 주민들은 장벽을 넘으려다 전기 울타리와 총에 쓰러져갔다. 처절한 육지의 섬, 미군의 공군 수송 작전으로만 움직이던 도시, 그 서베를린에 데이비드 보위가 있었다.
< Heroes >의 위대함은 바로 이 시대성에 있다. 베를린 3부작의 시작인 < Low >는 사실 프랑스 샤또 드 에후빌에서 녹음되었고 철학보다는 치밀한 소리 미학의 승리였으며, 브라이언 이노와의 관계가 서먹해진 < Lodger >도 역시 월드 뮤직과 아트 록의 실험적 결합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그러나 이 영웅의 서사시는 크라우트 록으로부터 펑크 록과 보위 스타일 소울을 더해 뉴 웨이브의 청사진을 그려내면서 1970년대 냉전 시대의 긴장과 분단의 시대상까지 옮겨오는 데 성공했다. < Low >로 그려낸 사운드의 바탕 위에 황폐하고 삭막하지만 분명한 심장의 고동을 더하며 인간의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앨범 작업은 < Low >의 올스타 멤버 그대로 장벽 바로 근처의 한자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크라우트 록에 대한 보위의 비상한 관심은 베를린 체류 시기 크라프트베르크, 노이! 등 창조자들의 작품을 흡수했고, 이 변신의 귀재 손에서 인공적인 일렉트로닉은 직관적인 록의 터치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시시때때로 붉은 군대의 감시를 받던 억압된 상황이 더해지며 앨범 전체를 뒤덮고 있는 황망한 아우라가 생성된다.
'Beauty and the beast'로부터 시작되는 A사이드는 진격의 기타 리프를 앞세운 록 트랙들이다. 프로그레시브 레전드 킹 크림슨의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을 초빙해 만들어낸 소리는 직관적이고, 강렬하면서도 미니멀리즘 철학에 근거해 건조한 사운드를 유지한다. 심지어 이 곡은 영락없는 소울의 코러스, 메인 리프 뒤의 디스코 스타일 기타 연주, 크라우트 록의 사운드 왜곡 등 그야말로 보위 노하우의 총동원이지만 어디 하나 튀는 부분 없이 안정적인 폐허를 재건해낸다. 이런 혼합은 곧바로 이어지는 'Joe the lion'과 'Blackout'에서도 재능을 뽐낸다.
이 어두운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이 인스트루멘탈 위주 구성의 B사이드다. 여기에는 베를린 터키 이민자들의 거주지를 그린 'Neukoln'과 일본 전통 현악기를 동원해 동양의 앰비언트를 구상해낸 'Moss garden', 이 트랙 앞에서 더욱 확실한 암울함의 대비를 들려주기 위해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예술을 신시사이저와 피아노의 결합으로 표현해낸 'Sense of doubt' 등 하나하나 치열한 트랙이 포진되어있다. 카를로스 알로마와 함께 < Station To Station > 시절의 월드 리듬을 일깨우는 'The secret life of arabia'의 마무리가 가벼운 전환을 제공하지만, 치열한 하나하나의 인스트루멘탈 실험에는 앰비언트와 아트 록, 크라우트 록의 정교한 결합과 이를 통한 새로운 소리의 대안이 탑재되어 있다.
그러나 보위 군단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곡을 꼽으라면 당연히 불세출의 송가 'Heroes'를 빼놓을 수 없다. 이 굽이치는 신시사이저 소리의 벽을 세우기 위해 브라이언 이노는 계속하여 기계를 손봤으며, 로버트 프립은 앰프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일명 피드백 효과에 조율을 살짝씩 다르게 하며 입체적 사운드를 만들었다. 여기에 토니 비스콘티는 세 대의 마이크를 순차적으로 활용하며 목소리의 울림을 통해 장대한 구성을 끝마쳤고, 마지막 보위는 '장벽 앞에서 키스하는 연인'의 서사시를 통해 시대에 강한 울림과 거대한 대서사시의 울림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설로 남은 이 곡 하나에 사실상 앨범의 전체 정의가 압축되어있다 하겠다.
지기 스타더스트와 영화배우, 씬 화이트 듀크 시절과 비교해 1978년의 보위는 풍족하지 못했다. 예술을 위해 찾은 베를린은 살벌했고 마약 중독을 이겨내야 했으며 재정적으로도 파산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이기 팝, 토니 비스콘티, 브라이언 이노가 있었고 분단의 도시가 제공하는 예술의 영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보위에게는 치열한 예술의 혼이 있었다. 제도권을 넘어 새로움을 창조하였고 외계인과 인공의 탈을 벗은 인간 그대로의 시선이 있었다. 우리 시대의 음악 영웅은 이토록 치밀하고도 따뜻했다.
아직 창창하던 이등병 때 완성한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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