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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Apr 29. 2017

젊은 우리 청춘은

혁오와 아이유, 20대 감정이라는 것들

스물넷. 청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단어 자체가 너무 올드하다고 해야 하나. 수능만 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은 게 어제 같은데 시간은 참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렀다. 까마득한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 앞만 보고 나아가기도 모자라서일까.


그러고 보면 우리 세대는 참 나이 얘기를 많이 한다. 한 살 더 차는 게 거의 공포영화 속 한 장면 같고 두세 살 차이가 나면 화석 취급을 당한다. 스무 살 친구들을 보며 부러움에 몸서리를 치고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아저씨가 된다.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어린 나이기에 '늙었다'는 푸념은 더욱 흔한 단어가 된다.


쫓기면서 살다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는 여유가 없다. 봄날에 도시락 들고 벚꽃 보러 가는 것, 옷 사러 돌아다니는 것, 힙한 동네라는 데 가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 찍는 게 여가라면 그건 너무도 피곤한 삶이다. 대신에 해야 할 일은 뭐가 또 그리 많은지. 다들 과제에 치이고 학점에 신경 쓰고 또 돈은 있어야 하니 알바도 뛰어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또 놀고, 일하고, 또 놀다 보면 어느새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골방에서 수많은 아이돌 친구들의 재롱잔치를 보면서.



아이유처럼 날 좀 알 것 같다는 고민조차 부족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 Palette >의 표현법은 어느 정도 답답한 이 세대를 대변해줬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몇 살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짚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이 잘'의 무미건조한 연인들의 대화, 'Black out'에서의 아무 말 대잔치 또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새 세대의 소통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음이 그처럼 무기력하다는 건 좀 슬프다. 나이 따지고 연차 따지는 순간 이미 젊음의 마인드는 아닌 것이다. 청춘은 정말 정신없이 살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기에 빛나는 거지 뒤돌아보고 그리워한다고 멋지지 않다. 아이유의 청춘 선언은 거창한 자아 선언의 '이름에게'로 끝을 마무리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은 의문이 이런 데서 든다. 이미 다듬어진 문법 아닌가. 고민 고민하다가 방황하다가 결국 마무리 발언으로 앞으로의 다짐을 이야기하는 게. 새로운 모습도 좋지만 어디로 튈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던 과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다. 보다 발칙했던 전작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아예 노래 제목에다 '2002 worldcup'을 천명한 혁오는 더 직설적인 노스탤지어다. 벌써 세 번의 응답하라 시리즈가 나왔건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나 1994년 미국 월드컵을 그리워하는 노래는 없었다. 초등학생 때 다들 좋아라 하니 기뻤던,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축제를 즐겼던 그때를 들춰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청춘의 불안을 노래하기로 한 < 23 >에는 성공으로부터 온 자신감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담겼고 선명한 사운드 스케이핑이 있지만 어딘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라 노래하는 'TOMBOY'까지 이어지면 정말 극단적 단계의 청춘 송가임이 분명해진다. 꾸며낸 성숙과 그 틈새에서 피어나는 불안. 


우리 세대가 나이 얘기를 좀 덜 했으면 한다. 20년 전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라며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심었다. 현재 2017년에는 모두가 불안하고, 처지고, 혼란스럽고, 무덤덤하고, 어디론가 돌아가고만 싶어 한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빼곡히 채운 감성 터지는 산문과 시집들, 무기력에 빠져들게 되는 음악들. 젊은 꼰대의 푸념일 수도 있지만, 벌써부터 나이 얘기를 하면 어쩌자는 거다. 꼭 공감받고 뭔가를 알아가야 의미 있는 청춘인건가. '골로 가는 청춘'도 있는 건데. 그만 얽매이고 그만 정의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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