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비스 스콧, 음악 페스티벌, 한 시대의 마무리?
음악 페스티벌에서의 사고는 한 시대의 종언을 상징한다. 1969년 알타몬트 무료 페스티벌에서 롤링 스톤즈의 공연 도중 흑인 청년 메레디스 헌터를 칼로 찔러 죽인 바이크 갱 헬스 엔젤스(Hells Angels)는 1960년대 자유와 평화를 찾아 방랑하던 히피 문화를 끝장냈다. 어쩌면 그 비극은 알타몬트 페스티벌을 잉태한 전설의 무대 우드스톡(Woodstock)에서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후대 지미 헨드릭스의 불타는 미국 국가 연주 등 상징적인 장면으로 미화되었지만 현장을 찾은 관객들은 열악한 시설과 부족한 운영에 고통받아야 했으며 주최 측은 당시 금액으로 130만 달러에 달하는 적자를 봤다. 그럼에도 '우드스탁 정신'의 낭만을 잊지 못한 이들은 공연 25주년과 30주년을 기념해 다시금 새로운 우드스탁을 개최했다. 결과는? 스테이지 위로 진흙 덩어리를 집어던지던 1994년, 성폭력, 폭동, 방화로 얼룩지며 1990년대 얼트 록과 뉴 메탈의 폭주에 사형 선고를 내린 1999년의 공연이었다.
운이 나빠서, 천재지변이 불어닥쳐서가 아니었다. 공연장의 비극은 대부분 인재(人災)다. 우드스탁의 기획자들은 예상 관객을 5만 명 정도로 잡는 실수를 범했고 그 결과는 뉴욕의 시골 베델 평원에 몰려든 4~50만여 명의 인파였다. 역사상 첫 록 페스티벌에 고무된 롤링 스톤즈는 대대적인 무료 공연 알타몬트 페스티벌을 기획했지만 운영 주체를 악명 높은 폭주족들에게 맡겨버렸다. 1999년의 우드스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 악행은 HBO MAX의 음악 다큐멘터리 '우드스탁 : 평화, 사랑, 그리고 분노'에 잘 담겨 있다.)
2021년 11월 5일 우리는 트래비스 스콧의 아스트로월드 페스티벌 대참사를 목격했다. 텍사스 휴스턴 NRG 파크에 운집한 5만 관중이 쇼의 주인공 트래비스 스콧의 등장에 맞춰 일제히 무대 앞으로 돌진하자 지옥이 펼쳐졌다. 스페셜 게스트로 무대에 오른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드레이크의 등장은 그나마 사람들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이성까지 빼앗았다. 펜스에 짓이겨지고 인파에 휩쓸린 관객들은 살기 위해 앞사람의 팔을 물어뜯고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쳐야 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8명이 죽었다. 두 명이 십 대였고 다섯 명이 이십 대였다. 3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세 명은 생명이 위독한데 그중 한 명은 9살짜리 소년이다.
그 와중에도 쇼는 진행 중이었다. 트래비스 스콧은 광적인 환호와 수많은 인파에 휩싸여 스테이지 맨 앞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비규환의 현장을 탈출하고자 하는 이들이 절규하는 사이 일부 팬들이 무대 장치를 타고 무대 위로 올라와 카메라맨과 아티스트에게 힘껏 외쳤다. '쇼를 멈춰! (Stop The Show!) 사람이 죽었다고!'. 이내 5만 인파를 헤치고 구급차가 가까스로 현장에 진입했다. 트래비스 스콧의 파트너 카일리 제너는 그 광경을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촬영하면서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닫지 못했다. LSD에 흥분한 팬들은 앰뷸런스 위로 기어 올라가 춤을 추다 사람들 위로 몸을 던졌다. 트래비스 스콧이 공연을 중지한 것은 사고 발생 30분 후 관객석의 앰뷸런스를 보고 난 후였다.
대참사가 벌어진 후 트래비스 스콧은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황폐한(devastated)' 감정을 드러내며 유족들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도의적 책임 말고도 묻고 싶은 것이 많다. 트위터, 틱톡, 인스타그램을 통해 아티스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센 와중 트래비스 스콧과 공연을 주최한 라이브 네이션, 심지어는 게스트 드레이크에게까지 총 19건, 수억 원 대의 소송이 걸린 상황이다.
이 날 공연은 5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여 NRG 파크에 설치된 무대 '유토피아 마운틴'에서 펼쳐졌는데, 메트로 부민, 이브 튜머, 돈 톨리버, 로디 리치, 릴 베이비, 시저(SZA) 등 아티스트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일정이었음에도 무대를 분산한다거나 시간 여유를 두는 등의 노력은 전혀 없었다. 8시 30분부터 9시까지 트래비스 스콧의 등장을 카운트다운한 시계 '하이프(hype)'는 관중의 흥분을 부추겼다. 웅장함, 장엄함, 쾌락, 기대가 고조되는 사이 안전은 뒤로 밀려났다. 현장을 통제할 인원 채용도 졸속으로 이뤄졌다.
텍사스 휴스턴을 대표하는 래퍼 트래비스 스콧은 2010년대 힙합 음악을 상징하는 슈퍼스타다. 그는 1990년대 멤피스 등지에서 유행하던 트랩(Trap) 장르를 대유행시킨 장본인으로, 화려한 비트 체인지와 독특한 곡 구조를 통해 힙합을 한 단계 진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아스트로월드'는 트래비스 스콧이 2018년 발표한 정규 3집이자 그의 대표작 제목이다.
그의 무대는 로파이(Lo-Fi) 스타일, 멜랑콜리한 감성을 담은 음악과 달리 펑크 록,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을 방불케 하는 거친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높은 발코니에서 몸을 던지고, 롤라팔루자 페스티벌에서 팬들을 선동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바도 있다. 이미 2019년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트래비스 스콧 : 날 수 있어'에서 스테이지 위로 몸을 던지는 아티스트와 광분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영상에는 공연 담당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압력, 크라우드서핑, 빠져나오려는 애들도 많을 거야.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는 얼마나 심각해질지 몰라.'.
롤링 스톤의 제프 이하자(Jeff Ihaza)는 아스트로월드 비극에 대해 '트래비스 스캇 브랜드는 이것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기획 기사로 현재 트래비스 스콧에 쏟아지는 비판을 분석했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음악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통해 트래비스 스콧은 급속히 자신의 세를 불려왔으며, 그 결과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나이키 운동화를 콜라보하고 인기 게임 포트나이트에서 온라인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자체 페스티벌을 운영하는 슈퍼스타가 되었다.
기사는 그 일련의 움직임 속 실물 사업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트래비스 스콧은 단지 읽기 쉬운 콘텍스트를 발굴하여 입맛에 맞는 '상품'을 만들어냈을 뿐, 음악 외에 어떤 의미있는 움직임이나 결과물을 만들지는 못했다는 비판이다. 화려한 테마 파크의 공허한 분위기를 채우기 위해 그의 콘텐츠는 더욱 거칠고 자극적이어야 하며 그 결과 중 하나가 공연장에서의 폭력적인 퍼포먼스로 발현된다. 하드코어 음악 공연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싱(Moshing)과 스테이지 다이빙이 난무하는 트래비스 스콧의 음악은 언더그라운드 정신이나 팬 커뮤니티와는 큰 연관이 없다.
그는 콜라보레이션에 능하지만 오리지널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스콧의 브랜드는 돌발 상황과 비극에도 계속 몸집을 불리는 수밖에 없다. 트래비스 스콧은 사망한 이들을 위해 장례비를 지원하는 것과 더불어 애플리케이션 베터헬스와 제휴를 맺고 무료 심리 상담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렇다. 또 다시 콜라보레이션이다.
영국 사이트 하이스노비티(HIGHSNOBIETY)의 우려처럼 많은 이들이 '아스트로월드는 우리 세대의 알타몬트 페스티벌'이라 생각한다. 2010년대를 지배한 힙합 슈퍼스타들이 거대 기업화되며 추한 면모를 드러내고 깊이있는 주제 의식 대신 자본과 쾌락의 전도사를 자청하며 너무 오랜 시간 안주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미투 운동을 비판한 카니예 웨스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드레이크의 엄청난 컴백은 1주 천하로 끝났다. 그리고 아스트로월드 대재앙이 펼쳐졌다.
물론 이것이 트래비스 스콧의 커리어를 끝장내지는 못할 것이다. 알타몬트의 사고 이후에도 롤링 스톤즈는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밴드로 군림하고 있으며, 1999년 우드스톡의 혼란 한가운데 존재했던 밴드들 역시 건재하다.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트래비스 스콧은 분명 아스트로월드의 실패를 만회할 다른 콘텐츠를 들고 나올 것이다. 하지만 하이스노비티가 지적한 대로 스콧은 '연관성(Relevance)'을 잃었다. 그를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문화적 흐름에서 탈락한 것이다. 비단 스콧 뿐 아니라 힙합 신의 슈퍼스타들 전체가 새겨 들어야 할 지점이다.
트래비스 스콧의 대표곡은 '아스트로월드'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 싱글 '식코 모드(Sikco Mode)'다. 오랜 시간 동안 혼란스러운 세계를 잊기 위해 많은 이들이 폭주 상태로 돌입했다. 아스트로월드 페스티벌의 압사 사고는 이제 그 광기를 거둘 때가 왔음을 암시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동안 억눌린 분노를 슬기롭게 해소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그것이 광기의 '로데오(Rodeo)'여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