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 2017.09.06
며칠 지나면 전역을 하게 된다. 징집된 한국 남자들이라면 전역 전 날 혹은 임박한 그 날에 어떤 기분일까, 어떤 감정일까를 하루에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상상하며 기나긴 군 생활을 버티곤 한다. 언제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어떻게든 군 생활을 돌아보는 글을 꼭 마지막 즈음에는 남겨놓고 말리라 거창하게 다짐을 했었고, 시간은 흘러 어쨌든 이 날이 왔다. 그러나 지겹도록 들어온 전역자들의 말 '별 거 아냐'라는 걸 너무도 일찍 깨달아버린 터라 별 감흥이나 기쁨이 또 없다. 설상가상으로 8월 휴가 때부터 거의 사회인 수준으로 급하게 복학을 준비하고 방 알아보고 이리저리 고민하다 보니 기억은 점차 흐릿해지고 결국엔 내가 왜 또 하루를 군에서 자야 하나 싶은 불평까지 생기기도 한다. 뭐 그렇다. 간사한 게 사람이지.
어린 시절 학교나 다른 기관에서 미래의 직업군 혹은 직업 적성을 알아봐 주곤 할 때 나의 미래에는 항상 군인이 포함되어있었다. 누군가는 매우 루즈하지만 루틴대로 움직이는 점을 들었고, 다른 누구는 끔찍할 정도의 고집 때문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아니었다(...). 물론 나는 매일 그래 왔듯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정해진 시간을 지켰으며 시키는 데 딱히 불만도 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새로운 나를 알게 됐는데, 그놈은 치밀한 척 하지만 심각한 결정장애에 시달리고 끝없이 억누르지만 딱히 해결방안도 없으면서 무조건 새로운 걸 원하는, 실로 이상한 캐릭터였다. 몇 년 전 카페 휴지 위의 낙서로나 남아있던 '도어'가 다시 돌아왔다고 해두자.
도어를 키운 것은 9할이 절박함이었다. 지겨운 훈련소 내내 친구가 되었던 작은 수첩엔 매 순간마다 생각나는 노래 제목을 새겨놓았다. 면회에서도 마찬가지였고, 후반기 교육 넘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방 인트라넷에 올라오는 뮤직비디오 모음이라도 들으려고 발버둥 쳤던 기억이 난다. 입대날 미처 듣지 못했던 러블리즈의 '그대에게'가 나왔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2016년 1월 15일, 나는 조교로 20개월 군 생활하라는 명을 받았다. 한 달만에 들어본 노래 가수가 러블리즈라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사람들 보기에 공포의 빨간 모자(...)를 쓰게 됐지만 관심은 잿밥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글 쓰고 음악 듣고 하던 노트를 보면 이 넘은 하루 종일 일 안 하고 허튼짓이나 했구나 싶다. 빌보드 차트를 정리하시겠다고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 넘버 원을 다 베껴 썼다거나, 면회 날 보위의 < Heroes >를 완성해놓는다거나... 아, 그러고 보니 난 군대에서 수많은 레전들를 잃었다. 훈련소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모터헤드 레미 킬미스터가 세상을 떴고 수료 전날엔 커리어 정리도 끝마치지 못한 데이비드 보위가 가버렸다. 곧이어 이글스의 글렌 프라이가,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모리스 화이트가 떠났다. 화려한 봄날엔 프린스를, 겨울이 온다 싶으니 조지 마이클이 사라졌다. 이 모든 게 내게는 스트레스였다. 프린스가 죽었는데 그의 노래 하나도 못 듣는 신세라니.
살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다. 나의 관심은 군대에 있지 않았다. 급기야는 여유가 좀 생겼다 싶으니 여기 브런치를 만들어서 군대에서 글을 기고하는 미친 짓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중에 원고를 짜고 주말에 폐인같이 모든 싸지방 시간을 글에 갈아 넣는 일과가 업데이트됐다. 아마 그때부터 일도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다. 후임들에게 난 좋은 선임이 아니었을 것이다. 웬만한 문제가 아닌 이상 별 관심도 없었고 어떻게 하든 저렇게 하든 피해만 없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관심은 오직 밖에만 있었다. 절대 뒤처져서는 안 돼, 뭐라도 배워서 나가야 해. 제일 강박이 심했고 가장 불안했던 시기였다. 열심히 하면 보상받을 거라는 말이 위로가 되질 않았다. 시간은 항상 빨리 갔다.
그러다 보니 사람도 달라졌다. 그래도 복고가 짱이라고 생각하고 옛날 음악을 지겹도록 많이 들었지만 정작 나의 취향을 분석해준 애플 뮤직의 리스트에는 프랭크 오션, A$AP 크루, Arca와 Perfume Genius가 들어있었다. 예전엔 어떻게 저렇게 단정하게 하고 다녔지 싶다. 스타벅스가 없는 삶은 정말 괴롭다. 자본주의는 정말 좋다. 패스트푸드를 너무 사랑하지만 속이 좋지 않아 끊어야 할 것 같다... 군대 전과 후의 사람은 달라진다더니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레트로는 기겁하고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그런데도 LCD 사운드시스템은 좋다? 제임스 머피 만만세?
그렇게 살았으니 벌을 받아라? 7월 말부터 휴가가 많이 생겼고 그때부턴 빠른 적응을 위한 준비에 또 정신이 없었다. 한 학기 쉬어도 좋지 않겠냐는 마음속 천사? 악마? 아무튼 그 넘들의 말이 있었지만 수강신청도 그럭저럭 되고 방도 일사천리 노트북도 빠른 배송... 모든 게 빨리 돌아오라는 손짓으로만 느껴졌다. 덕분에 2년 만에 가본 학교는 적응은 잘 안되지만 아주 유세윤의 복학생 수준은 아닌 것 같고, 다시금 시작된 자취 라이프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것 같다. 이즘에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누가 엄청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사실 무언의 압박이 없을 수는 없지만... 쿨럭...) 어떻게 하다 보니 쓰고 있었다. 모르겠다 히힣 글 쓰다가 인생 말아먹기^^
먼저 군대에 와 먼저 떠났던 수많은 선임들은 몇몇이 전역의 기쁨에 취해 난리 브루스를 추긴 했지만 대부분은 별 게 아니라며 조용히 제 갈길을 갔다. 그 말이 허세가 아닌 게 정말 하나도 별 게 아니다. 심지어 하루만 들어갔다 나오면 되는 나는 교수들에게 이 사정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다. 왜 남은 이틀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나. 특히 몸은 군대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밖에 나갔던 (나가고 싶어서 간이든 쓸개든 다 뽑으려고 하던) 터라 더 피곤하다. 내 군 생활은 왜 이렇게 기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을까?
군 생활은 엄청 빠르게 잊힐 것이다. 물론 당장 들어가서 하루 있기도 해야 하고 예비군도 한참 남았다. 길고도 긴 시간이었으니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의 기본 탑재 지식과 허세 충만한 경험담도 자동 탑재가 됐다. 하지만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뛰면서 소리 지르고 1.34톤 발칸포를 들고 옮겨 다녔다는 사실은 정말 낯설다. 하루 삼시 세끼 밥 안 먹으면 곤경에 처하던 나는 매일 아침에 빵만 구워 먹거나 탄산수만 들이키면서 살고 있다. 22시 이후 잠 설쳐가며 몇 마디 하다가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졌었는데 이제는 누워 있어도 잠이 안 오고 그렇다고 뭔가를 한다고 해서 잠이 오는 것도 아니다. 걸 그룹만 나오던 뮤직뱅크는 유튜브 속으로 옮겨갔고 LCD 사운드시스템의 새 앨범에 미쳐가고 있다. 게다가 아름다운 스틸리 댄의 월터 베커가 갑자기 죽었다.
정말 이렇게 별 거 아니었는데 2015년 9월 전, 그리고 12월 전에는 뭐가 그렇게 불안했었는지. 정말 별 거 아니었는데.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만 정말 군대는 별 게 아니었다. 그 허무함 속에서 뭐라도 건져보려 했던 게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어준다면 그나마 만족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성장하긴 한 걸까? 너무도 많은 생각이 오히려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던 정신없는 군 생활이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릴 줄이야.
암튼 미리 축하합니다. 9월 6일의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