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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Nov 03. 2017

에픽하이의 아홉 번째 앨범

They've done something wonderful.


'Lesson' 시리즈의 비장함을 이어가며 '기어 다니는 자의 달콤한 혀를 믿지 마'까지 재소환하는 오프닝 '난 사람이 제일 무서워'가 팀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을 요약한다. '숨을 쉴 수가 없'는 현실을 냉소하는 스타일은 전과 같이 날카롭지만 '소리 아닌 상처 내서 만든 노래들 / 피투성이지만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의 안도는 이제껏 없던 결말이다. 비극적 현실로부터의 도피 < 99 >와 제 궤도를 다시 찾은 < 신발장 >을 거쳐 데뷔 14년 만에야 뒤를 돌아볼 여유를 찾은 에픽하이다.

현재 완료형 시제의 앨범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그들의 상징적 작법을 다시 풀어낸다. 가까이는 '헤픈 엔딩'부터 '1분 1초'와 'Fan'의 아련한 사랑의 감성을 '11월 1일' 풍의 피아노 연주로 풀어낸 '연애소설'은 타루, 윤하, 지선을 잇는 새 뮤즈 아이유까지 철저한 과거의 문법을 따른다. 오혁의 쓸쓸한 목소리가 빛나는 더블 타이틀 '빈 차' 역시 < [e] >의 < emotion > 파트와 < 열꽃 >의 중간쯤에서 가져온 결과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영어 가사만으로 곡을 끌어나가는 고뇌의 'Here come the regrets'도, 일상 속 무기력한 자아를 '난 왜 이럴까' 라며 힘없이 다그치는 '상실의 순기능' 또한 < Remapping The Human Soul >로, < Pieces, Part One >으로 치환이 가능하다. 심지어 냉소적인 공격 '노땡큐'조차 'Born hater'와 '흉', 'Eight by eight'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PIK HIGH - '빈차(HOME IS FAR AWAY) + 연애소설(LOVE STORY)' M/V


진보적인 시도나 새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진 않지만 특유의 '에픽하이 감성'은 너른 공감을 무리 없이 획득한다. '힐링', '위로'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2000년대 초중반, 쓸쓸하고 외로운 감성으로 한줄기 굳은 희망을 전하던 이 문체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힘이 있다. '전부 명장면'이었던 추억의 한 페이지 페이지를 넘겨가는 '연애소설'과 막막한 외로움의 도시인들을 위로하는 '빈 차', 9년 전 '낙화'를 김종완의 목소리로 잔잔히 재현하는 '개화'는 분주한 일상에서도 조용한 사색에서도, 오랜 팬들은 물론 그들의 이름을 처음 듣는 이들에게도 유효하다. '한숨은 쉬어도 내 꿈은 절대 포기 못하'는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펜으로 백지 위를 달린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곡이 '어른 즈음에'다. 'Tape 2002年 7月 28日'의 짧은 복고적 스킷을 지나 젊은 날의 친구들에게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고 어쩔 수 없이 멀어진 현실을 보듬는 이 곡에서, 타블로와 미쓰라는 그들과 함께 자라온 에픽하이 세대들, 어른 아이들에게 행복을 빌고 재회를 기원한다. 레트로지만 낡지 않은 이 감성은 '너의 맘 한편 비워 놓는다면, I'll come back'의 '문배동 단골집'을 통해 마무리되고, 에픽하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다. 

역사와 깊이가 있어 가능한 작품이다. 비록 더 선명하고, 더 날카롭고, 더 시렸던 때만큼은 아니라도 그 시절을 다시금 찾고, 듣고, 또 부르게 만드는 주제를 실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추억을 따라가고 지난날을 돌아보다 보면 그제야 제목의 의미가 가슴속에 들어온다. 항상 곁에 있어주던, 울고 웃고 또 위로해주던 이들이 '그동안 대단한 걸 해왔다는'걸. They've done something wonderful. 



[ART VIDEO FULL Ver.] EPIK HIGH - ‘연애소설 (LOVE STORY)’ feat. 아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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