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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례 Feb 03. 2024

할머니

분명 할머니가 맞는데 내 속에 갇혀서 착각하고 살았다.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탔다. 

붐빈다. 천장 고리 잡고 창 쪽으로 눈을 두고 섰다. 뒤쪽에서 

“할머니” 

부르는 소리가 난다. 간격을 두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노인넨지 귀까지 먹었나 보다 생각했다. 한데 내 귓전에서 제차 속삭이는 소리

 "할머니! 뒤에 자리 있어요. 저 곧 내릴 거예요." 

그러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건 내가 할머니란 사실이었다. 난 절대로 할머니가 아니었거든. 앞도 아닌 뒤에서 할머니라 부르니 적이 놀랐다. 나이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살았는데 뒤에도 나이가 붙어있음을 알게 됐다. 모자에 색안경에 마스크까지 덮어썼으니 앞에서도 모를 거라 여겼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괜찮은데. 고마워요.” 

화답을 하고는 앉았다만 기분이 묘했다. 이제는 할머니가 아니라고 발뺌을 해도 소용없겠구나 싶었다. 청년이 본 게 그대로였으니까. 아주머니라고 해주면 좀 좋아. 어렸을 때는 빨리 컸으면 좋겠더니만 나이 먹으니 할머니는 되기 싫은 모양이다. 쉬어갈 줄 모르는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앞에서 봐도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마스크에 안경에 모자까지 위장하면 아주머니로 보아줄 줄 알았나 보다.


한 번은 택시를 탔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건너가지 않고 지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노인이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나 어서 건너갈 일이지 교통신호를 하고 있다고 말하니, 기사양반 하는 소리 좀 보소. 

“할머니는 안 그럴 거 갔지요. 노인 되면 다 정신이 없어요.” 

한다. 그래서 어느 요양원 돌비에 《노인은 다 옳다》 고 새겨놓은 것인가. 젊은 사람이 그랬다면 아마도 또라이라 하였을 테지만, 노인이라 맞춰줘야 된다는 지혜인지, 택시기사는 그 장면에 그저 웃어넘긴다.

여기서도 할머니소리를 듣다니 내 참. 내가 할머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할까 보다. 거울을 보나 사진으로 보나 분명 할머니가 맞는데 내 속에 갇혀서 착각하고 살았다. 자아에게 외친다. 그래 당신은 분명 할머니라고. 귀머거리한테 외치듯이 나 자신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남 말 하고 있다는 식의 택시기사의 웃던 얼굴이 떠오른다. 몸은 할머니지만 마음만은 아줌마니 고집을 피워도 어쩔 수 없다. 그건 내 맘이니까 하다가도 길가에 처연하게 떨어지는 목련 꽃잎을 보면 너도 그렇구나 싶다. 그러나 꽃은 시들어 떨어졌다가도 다음 해에 다시 피어나지 않던가. 이럴 때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말을 믿고 싶다. 내가 태어나고 싶은 그 무엇에 대하여. 꽃이 좋을까 동물이 좋을까 생각에 젖어보기도 한다.

할머니소리가 어지간히도 듣기 싫었나 보다. 인정할 거는 인정하라고 육신이 다그친다. 시나브로 육신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릴 때는 비로소 인정을 해 버린다. 그러다가도 마음은 때때로 육신에 도전을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속인다고 될 일도 아니고 버팅긴다고 바뀌지 않을 테니 다소곳이 좌중해야 한다. 그래 난 할머니야 라고 당당하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뻔뻔스러워진다. 지하철도 고개 들고 무임승차하고, 영화도 반값에 볼 수 있고, 할인받는 관람료 등등, 좋은 마음으로 관람하게 된다. 어떤 이가 한 말 “늙고 병들면 자연 의지하는 맘이 듭디다.”처럼 경로우대를 받는 게 자연스러워져 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 자연 순리로 받아들여야지 싶다. 늙는 것이 열등감도 수치스러운 것도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가족이 할머니랑 손잡고 걷는 모습이 정겹다. 나도 손주를 보고 싶다. 할머니라 불러주는.


퐁당

지은이: 양 순 례


밖에서 벌을 받고

이불속 퐁당 빠져

당신 품 그리다가

포근함에 취한다

뭐 되어 위로받고 싶은지

반딧불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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