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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례 Feb 10. 2024

방우리

내 눈에는 목줄이 거슬린다.

해맑은 날이다.

 앞집 아주머니가 화초며 채소를 정성껏 매만진다. 문밖에 내어놓은 화분들이 오밀조밀하다.

“참 예뻐요, 어쩌면 이리도 잘 가꾸세요.”
“사랑으로 키우는 거죠.”

사랑 좋지, 암 사랑이 있어야지. 햇살이 아주머니 머리 위로 윤슬이 되어 내려앉는다. 우리 방우리가 보았다면 두 얼굴을 하고 두 마음이 퍽이나 자연스럽게 보였을 게다. 아주머니는 가증스럽고, 우리 주인은 배알도 없다고 비아냥거릴 것만 같다. 그때는 왜 그리도 험한 얼굴이었을까. 걸음이 저만치 멀어지는데, 머리카락이 바람에 헝클어지는 기분이었다. 물먹은 풀잎 살아나듯 눌렸던 기억이 고개를 쳐든다.

“자 껏, 쥐약을 확 뿌려버려야지.”

섬뜩했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머릿속에 오래 각인되어 있던 소리다. 내가 사는 동네는 골목 사이사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아주머니들이 우리 대문 앞에 모여서 이바구를 하곤 했다. 방우리는 그 모습이 불안했던지 짖어댔다. 그때는 퍽 서운했다. 방우리만 나무라면서도 내심 꿍하여 한동안 고개 돌리고 말을 섞지 않았다. 이웃 간에 쥐약까지 들먹이다니 심했다며 수군대는 이도 있었다.


앞집 아주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옆집 할아버지도 못잖았다. 밤에 옥상에서 뛰어다니는 통에 잠을 잘 수 없다고, 저놈의 개 잡아먹든지 해야지 원, 하면서 무지막지한 소리를 해댔다. 가슴이 덜덜 떨렸다.

“방울아, 무섭다 우리가 여길 떠나야 할랑가보다.”

하루 종일 목줄을 메어놓는 게 안쓰러워서 밤이나마 자유를 주겠다는 내 생각이 화근이었다. 그로부터 주위 사람들 눈치 보느라 주눅이 들어 죄인 같은 나날이었다.


방울이는 생후 1개월 때 서울서 입양해 왔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엄마의 적적함을 다소나마 채워주기 위한 아들의 효심이랄까. 내심 고마웠다. 방우리라는 이름만 내가 지었을 뿐, 강아지에 관한 모든 것은 아들이 신경 써 주었다. 강사모(강아지를 사랑하는 모임) 카페까지 알선해 주며 공을 들였다. 나 또한 아기 키우듯 정성스레 돌봤다. 귀여운 동영상을 아들 카톡에 올리면서 모자母子는 웃는 날이 늘어갔다.


한데 아들의 말과는 달리 강아지 몸집이 점점 커졌다. 방 안에서 키우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결국 마당으로 유배되면서 이웃에 미움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갔다. 알고 보니 견종이 믹스 견 비글이라니 아들이 속은 거였다. 엄마를 위한다는 게 오히려 민폐를 안긴 셈이 되었다고 여간 미안해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난 괜찮았다. 방울이와 정이 듬뿍 들었다. 마당에서 방우리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 지나던 사람이 대문 사이로 빠끔히 들여다보고 웃곤 했다. 나랑 오래 함께 살 줄 알았다.


밴드에 예쁜 강아지 사진이 올라왔다. 분양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듬어보고 싶다. 하나 앞집 아주머니와 옆집 할아버지가 화살 눈을 하고 쏘아보는 것만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마터면 입양할 뻔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사람과 강아지가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 정겨워 보인다. 우리 방울이도 그와 같은 환경으로 보내 줬어야 했는데. 아들은 오랫동안 동고동락하고 생을 마감한 고양이를 고이 장례를 치르고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 동물에 관심이 많다 보니 길 가다가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한 번은 지하철 구석에 피부병 걸린 고양이를 데려다 치료해 주었다. 친구가 보더니 예쁘다며 자기도 키우고 싶어 했다. 중도 포기하지 않을 자신 있으면 가져가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부담됐던지 슬그머니 호기심을 접었단다. 그처럼 단호한 말이 나올 줄 몰랐으리라. 길고양이나 유기 견들이 발생하는 이유가 처음에는 예뻐서 키우다가 싫증 나면 아무렇게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환경과 만남이 중요하다. 아들네와 함께 행복했던 고양이를 생각하면 방우리한테는 한없이 미안하다. 나는 과연 진정한 사랑을 베풀었을까. 방우리한테 맞는 거처를 마련해서 보고 싶을 때 가만가만 가 볼 수 있는 곳을 물색 중이었는데. 야구장에서 요란한 축포 소리가 날 때면, 품에 보듬고, 잠잠해질 때까지 밤하늘에 퍼지는 불꽃을 바라보던 기억들이 싸하게 뇌리를 휘젓고 지나간다.


새벽 수영을 마치고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쏜살같이 뛰쳐나갔을 때, 예전처럼 다시 들어올 줄 알았다. 한동안 밤낮으로 대문을 열어 놓았지만 오지 않았다. 방우리는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심을 하고 나간 게야, 주인을 더 이상 욕되게 할 수 없었던 게지.’

생각하면 야속하고 사무치도록 그립다. 혼자 두고 외출했다 들어오면 꼬리치고 안기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 방우리가 마당에 있는 것만 같다. 가출했을 당시에 얼마나 골목을 헤매며 찾아다녔던가. 정신없이 남의 담 너머로 확인하며 다녔다. 그때는 왜 찾는 광고를 내지 못했는지. 눈에 밟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릴 때 예방접종하러 갈 때면 예쁘다고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약수터로 산책할 때면 정신없이 뛰어놀다가도 제 이름 부르면 어느 결에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외출할 때면 옥상에서 가물가물 주인이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던 모습 하며…….


단조鍛造 담장 집 강아지를 볼 때면 더 생각난다. 오며 가며 “안녕” 하며 불러 본다. 처음에는 컹컹 짖더니 이제는 낯이 익어 꼬리를 친다. 저런 상태였다면 애통해하는 일은 없었으련만. 그래도 내 눈에는 목줄이 거슬린다. 개는 전생에 노예였을까.



강아지풀

지은이: 양 순 례


하마터면 꼬리를 잡을 뻔했다


눈 오던 날 눈밭으로 나가더니

봄날 아지랑이에 치이고

여름엔 갈매 빛에 취하고

가을에는 눈이 부시어 길을 잃었더냐


애간장 태우며 밤잠 못 이루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두 눈을 흔들어놓는구나

너의 환상이 꼬리를 물고 젖어온다


보고 싶은 너의 부드러운 꼬리에

내 볼을 부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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