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전 일이다.
수확이 모두 마무리되고 복숭아밭 주인 사장님과 저녁 겸 반주를 먹었다. 토박이라고 했으니 몇 다리만 건너면 아는 분일지도 몰랐다. 내게는 알고 모르고 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토지 보상으로 무엇을 했는가였다.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인생이 되었을까?
“아버지는 공부만 하던 너희가 돈으로 뭘 하겠느냐 하시며 절대로 살아서는 나누어 주지 않으셨다네. 너무 엄하셔서 우리 아들들은 찍소리도 못 했지.”
우리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지금은 관세사와 과수원만 하세요?”
“그 두 개만 해서 어떻게 먹고살겠나?”
나는 두 개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건물을 두채 가지고 있다네. 아버지께서 남기신 돈으로 건물을 샀어. 여기는 공단 때문에 원룸이 많이 필요하거든. 하나는 내 명의고 다른 하나는 아내 명의로… 나름 임대 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지.”
“와 사장님 부자시네요!”
“부자는 무슨 부자야. 나이 먹으니까 들어갈 돈도 많아. 그래도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 중이야. 보상받은 거 날려 먹었다는 사람도 많던데.”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때 형이 조금만 신중했었더라면 지금 내 인생도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나도 모르게 과거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럼 자네가 석동이 동생이란 말인가?”
“저희 형을 아세요?”
“알다마다. 같이 술도 마시고 당구도 쳤던 사이지. 형은 지금 뭐 하고 사나?”
“그 일 터지고 연락 두절입니다.”
“그렇게 됐군.”
사장님은 형에 관해 더 이상 묻지 않고 내 잔을 채웠다.
“그럼 어머니는 살아 계신가?”
“아니요. 제가 이혼하고 혼자 모셨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안됐네… 자네 형을 보고 많이 배웠지. 무모하게 가구점을 차릴 때만 해도 부러웠는데, 허무하게 망하는 것을 보니 사업이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나도 그때는 아버지에게 사업하자고 졸랐거든. 그나저나 자네는 돈 한 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무일푼이 됐구먼.”
“처음에는 형이 많이 원망스러웠는데요. 이제는 원래 우리 돈이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사장님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친구 동생이니, 편하게 형이라 부르게. 정수형”
“형님, 감사합니다.”
복숭아밭에서 잠깐 일해 준 인연으로 동네 부자형을 알게 됐다. 형님과 술잔을 부딪치다 보니 20년 동안 지내온 시간에 눈물이 났다.
20대에는 변변한 돈도 기술도 없어서 생산직으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다. 그동안 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다. 10년 모은 돈으로 치킨집을 차렸다가 쫄딱 망했다. 실패 속에서도 아내와 잘 꾸려가며 그나마 버텼는데, 내가 술에 빠져 사는 것까지는 용서하지 못했다. 내가 철이 없었다. 아내에게 양육권을 넘기고 어머님을 혼자 모셨다. 그나마 어머님까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이제는 혼자 남았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딸도 보고 싶고, 어머니도 그리웠다. 솔직히 형도 보고 싶었다. 가족들 모두 뿔뿔이 흩어진 현실에 목이 메어 울었다. 동네 형님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나 보다.
“아직 젊은데 과수원 전전하며 일하고 있기에는 너무 아깝네. 재기할 생각은 없나?”
“해야죠. 하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망막합니다.”
사장님의 자상한 얼굴은 갑자기 차갑게 굳어졌다.
“일단 술을 끊으면 내가 일할 자리 하나 만들어주지. 단, 끊어야 해! 술주정뱅이와는 일하지 않아. 약속하겠나?”
나는 마시고 내려놓던 술잔을 뒤집었다.
“정말 뭐든지 해보겠습니다. 저도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