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수확도 끝났으니 다른 막노동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작년처럼 오토바이 배달 일을 다시 시작할까도 생각했다. 여름에 비까지 오면 작년 일이 생각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빗속을 뚫고 밤 배달을 나갔다가 물웅덩이를 보지 못해 미끄러졌다. 지나가는 차는 없어서 큰 사고는 면했지만 다리가 골절되어 3개월 동안 제대로 일하지 못했다. 하루 벌어먹고 사는데 사고까지 겹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왔다. 차라리 막노동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 형님이 이른 아침에 전화를 했다.
"일할 곳은 정했어?"
"아니요. 아직이요. 같이 일하던 십장에게 연락해 보려고요."
"그럼, 오늘 나 있는 곳으로 나오겠나?, 일당은 줄테니까."
"무슨 일인데요?"
"나 하는 일 좀 도와줘. 간단해."
"알겠습니다."
날씨도 더운데 실내에서 하는 일이라면 감사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나도 이제 배가 불러오나? 사람은 자꾸 편한 것만 찾으려 하니... 세상을 살다 보니 편한 일은 돈이 안되고, 험한 일은 위험한 대신에 일당이 세니까. 공짜란 없는 모양이다.
형님이 알려준 건물로 갔다. 4층짜리 회색 건물이 제법 컸다. 작은 창문이 바둑판처럼 똑같이 달려있는 모습이 마치 시골 동네 모텔 같다는 생각을 했다. 4층으로 올라갔다. 정수형이 문을 열어두고 가구를 꺼내고 있었다.
"원룸을 좀 치워야 해서 말이야. 너무 지저분한데 소문나는 것도 그렇고, 자네가 같이 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죠. 물건을 다 빼면 됩니까?"
집안에 들어서자 냄새가 장난 아니었다.
"쓰레기 냄새에요? 왜 이리 냄새가 심해요?"
"실은 여기서 사람이 죽었어. 일당으로 일하던 노인분인데, 고독사를 했더라고. 잘 처리하긴 했는데 치우는 게 일이네. 여기에 누가 들어올 것 같지도 않은데 큰일이야."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스산했다. 큰 가구는 없어서 그나마 수월했다. 큰 비닐봉지를 가져다가 작은 물건들을 넣었다. 냄새가 심해서 더워도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었다.
"다음은 베란다를 치워주게나"
베란다에서 햇빛을 받은 소주병이 초록빛으로 빛났다. 얼추 100병도 넘어 보였다.
"이 아저씨 알코올 중독자였어요?"
"어, 그런 모양이야. 나야 잘 모르지. 여기 입주한 사람이 32집인데 내가 다 어찌 알겠어."
소주병을 보고 있노라니 삶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여기서 깡소주를 매일 마셨을 테고, 저기 보이는 32인치 작은 TV로 무료함을 달래며 음식을 배달 시켜 먹었겠지. 하루 해가 넘어가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했을 테고, 싱크대에는 먹다 남은 라면 그릇이 던져두었을 것이다. 어찌 잘 알겠는가?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소름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살다가 나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백골이 될지도 몰랐다.
"형님, 혹시 여기 어떻게 할 예정이세요?"
"일단 냄새가 너무 심하니까 다 뜯어내고 올 인테리어를 새로 해야지. 이런 집은 소문나면 아무도 안 들어와. 안되면 창고로 쓰든지 해야지 뭐."
"형님, 여기 제가 들어와서 살게요. 싸게 주시면 안 될까요?"
"진짜로? 괜찮겠어?"
"네, 대신 올 수리해 주세요."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내가 전에 이야기했듯이, 자네도 술 끊어야 해, 나 여기서 두 명 보내고 싶지 않아."
좀 무섭기는 하겠지만,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 내가 정신 차릴 것만 같았다.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훨씬 깨끗하고 전망도 좋았다. 큰 엘리베이터도 있으니 자전거를 가지고 올라오기도 좋았다. 밤마다 뭔 소리가 들리면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었다. 현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물어도 조용했다. 그리고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냐니까요."
인터폰에는 사람이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어깨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무섭지? 내가 장난 좀 쳤어. 제사 지내고 음식을 좀 싸왔어. 현관에 두었으니 맛있게 먹게나."
형님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데 술 먹는 모습까지 보일 수는 없었다. 저녁에 혼자 술 마시는 일은 없었다. 일하다 마시는 반주 정도로 줄였다.
본격적인 겨울에 막노동도 쉽지 않았다. 나가려고 준비하는데 십장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눈이 너무 많이 오니까, 휴식이야. 내일 봐."
갑자기 찾아온 휴가지만, 아침을 먹을 곳이 없었다. 편의점에 가려고 나서는데 눈이 제법 쌓여 길이 미끄러웠다. 건물 뒤편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눈을 옆으로 쓸어 길을 만들었다. 자동차가 나가기 좋게 눈을 넓게 치웠다. 관리 업체가 이런 것까지 해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건물에서 출근하느라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이웃들과 멋쩍게 인사를 나누었다. 원룸에 열심히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내가 쓸어 놓은 길로 출근하는 이웃을 보니 뿌듯한 뭔가가 생기는 듯했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정수형이 이른 새벽에 웬일일까?
"자네 혹시, 건물 관리해 볼 생각 없나? 내가 두고 봤는데 자네가 참 마음 따뜻한 사람이야. 분리수거도 먼저 나서서 정리해 주고, 가끔은 복도에 쌓인 짐도 정리해 주던데. 그동안 관리 업체에 맡겼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있었거든, 자네가 해주면 좋겠는데."
"저야 좋지만, 관리 같은 거 할 줄 모르는데요."
"일단, 내가 시키는 것만 해주면 돼, 그리고 주택 관리사 공부를 시작해 보지 그래."
그날부터 입주자 수도를 고치고, 전기를 만졌다. 변기를 뚫어주고, 분리수거를 도왔다. 주차장 시멘트 작업도 직접 했다. 밤에도 갑자기 연락이 왔는데 술 냄새 풍기며 일할 수는 없었다. 막노동으로 다져진 삶이라 그런지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희망이 생기니 열정이 생겼다. 나면 잘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다.
"자네는 성품이 좋아. 그 마음만 잘 유지하게나, 기술이야 얼마든지 배우면 되는 거니까. 자네 덕분에 나도 마음 편하게 관리할 수 있어서 좋네."
형님은 어느새 관리비 수납과, 부동산 처리까지 내게 맡겼다. 내 집은 아닌데 내 집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