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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금싸라기 08화

복숭아밭 : 나를 돌아보다

by 행동하는독서

딸이 보고 싶어 학교를 찾았다. 한참을 기다려 교문을 나오는 딸을 멀리서 마주했다. 젖 먹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벌써 숙녀티가 나는 딸이 친구들과 내 앞을 지나갔다.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아빠가 옆에 서 있어도 모르는 모양이다. 사춘기 중학생 그대로의 때 묻지 않은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멀찌감치 따라가다 친구들과 헤어진 딸을 불렀다.

“소연아~”

소연이는 뒤를 돌아보고는 뛰기 시작했다.

“소연아, 아빠야. 기다려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더 이상 쫒아가는 게 의미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눈에 보이던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다 내 잘못이다. 딸도 아내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아빠, 미안해. 친구들 보는데 다시는 이러지 마."

"그래, 아빠가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딸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빠가 되고 말았다.


저녁에 장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네 뭐 하러 소연이 학교를 찾아가고 그러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인사는 됐고, 예민한 나이니까 건드리지 말게나. 이제 와서 애는 왜 찾고 그러나?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죄송합니다. 장모님.”

“그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하게나. 자네는 할 말이 그거밖에 없나? 남자가 능력을 갖춰야지. 딱 부러지지 못하고.”

“집사람도 잘 지내죠?”

“궁금하면 직접 연락해 보던가! 아니다 연락도 안 될 거야."

장모님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자네는 착하기만 한 건가? 악역은 우리 딸이 다 맡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이혼하면 그만인가?”

“다 제 잘못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저도 이제 술 끊고 새 출발 했습니다.”

“내가 자네를 미워하는 게 아니야. 자네도 이제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란 말이야. 피하지 말고, 부딪치면서 말이야. 착하기만 해서 어디에 쓰나? 한번 무너졌다고 술이나 먹고 다녀서야 쓰겠나.”

“알겠습니다. 장모님 명심하겠습니다. 장모님께 빌린 돈은 꼭 갚겠습니다."

"소연 엄마 곧 결혼할 거야. 언제까지 혼자 사는 거 두고 볼 수도 없고 해서 서둘렀어. 이제 연락은 자제하게나."

이혼한 남인데도 그 말에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데 미처 예상치 못했던 사람처럼 서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어느새 목까지 내려가 가슴까지 이어졌다.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착하다는 말이 이렇게 송곳처럼 파고든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착하다는 아버지 말이 좋았다. 착한 막내아들, 착한 사위, 착한 친구… 이제는 착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신호들이 나를 괴롭혔다. 내 속 깊이 뿌리내린 생각의 습관을 틀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하던 대로 생각하고, 편한 대로 말했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했고, 불편하면 피하려 했다. 사람들은 나를 착하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술만 끊는다고 될 일도 아니다. 내가 변해야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부동산 관련 책과, 서점에서 추천하는 마인드 셋 관련 책을 샀다.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읽은 책이 10권, 20권 쌓여가며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입자를 만나면 더 인사를 나누었고, 부동산에 들려 업무도 배웠다.


갑자기 정수형이 내 방을 방문했다.

"형님 어쩐 일이세요? 그냥 부르시지 뭐 하러 누추한 곳까지 올라오셨어요?"

"자는데 무섭지 않아?"

"그런 거 없어요."

형님은 이리저리 내 방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자네! 우리 집사람 명의로 된 건물도 관리해 보겠나?”

"네? 하나더요? 저야 감사하죠."

"그럼 힘들겠지만, 수입은 두 배가 되지 않겠나. 힘들면 사람 하나 써도 되고."

"아닙니다. 제가 더 노력해야죠. 감사합니다."

내가 변하려고 애쓰니까, 주변에서도 나를 도와준다. 형님은 건물 두채 모두 내게 관리를 맡겼다. 덕분에 제법 수입도 커졌다. 양육비로 아내 통장에 돈을 보내도 돈이 남았다. 혼자 사는 남자가 술 안 마시고 친구들 안 만나니까 돈 쓸 일도 없었다.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던 날 정수형은 내게 제안했다.

“자네도 이제 관리 업체 하나 차려보는 건 어떤가? 계속 내 밑에서 일하지 말고, 나랑 거래를 하자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목표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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