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된 사업자 등록증을 받았다. 내 명의로 받은 첫 번째 작품이다. 아내와 하던 치킨집은 처가에서 비용을 많이 보태어주었기에 아내 명의로 냈었다. 빚을 졌다면 내가 아니라 아내가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폐업했다고 책임감 없이 술이나 마시고 재기의 의욕도 없이 지냈으니 아내나 처가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을 테다. 그때는 돌파구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철이 없는 건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업자 등록증을 가져와 한참을 바라봤다. 이제 정말 일어서는 건가? 한번 망해봐서 그런지 잘해낼 거란 말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정수형에게도 열심히, 제대로 해보겠다고만 했다. 자신감이 떨어진 나를 돌아보는 게 안타까웠다.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감당할 만큼 책임감을 부여했다. 감당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든 가보기로 했다. 직원 4명 쓰고, 청소부터, 건물관리, 수금, 인테리어까지 손을 댔다. 형님의 추천으로 건물을 소개받아 다섯 동으로 늘렸다. 주변에서 나를 사장이라 불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사장님이란 호칭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미미한 희열의 피가 온몸을 감아돌았다.
수영이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자영업을 배우며 자기 돈을 벌고 싶다며 청소부터 하겠다고 했다.
"그거 쉽지 않은데, 젊은 여성이 하기에는 주변 사람 눈도 있고."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 밑에서 배우며 일하면 금방 배울 거 같은데요."
"나야 고맙지. 열심히 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뭐가 두렵겠어."
자기 삶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수영이는 술 생각이 날 때마다 나를 다시 각성시켰다.
정수 형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난 말이야, 자네의 착한 성품이 좋았어. 단지 자신 없는 자세가 문제였어. 원룸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고독사 했을 때 자네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자네에게 술 끊으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어."
"잘 하셨어요. 느낀 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살겠다고 했을 때 속으로 정말 놀랐어. 가능성 있다고 봤지. 충분히 변할 수 있을 거 같더라고.”
“감사합니다. 형님 덕분에 자리 잡았습니다.”
형님은 내 손을 잡았다. 형님의 거친 손바닥이 느껴졌다. 어떤 일이든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일이란 말이야, 내가 공부하고 해 왔던 분야에서 도전해야 해. 알지도 못한 곳에 돈을 넣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지. 이제 자네는 뭘 해도 충분히 해 나갈 거야.”
삶 자체가 실패의 연속이었다. 20대는 몰라서 형에게 당했고, 30대는 경험이 부족해서 망했다. 지금은 재기할 방법이 없어 헤매고 있었다. 내가 나서서 찾아야 했는데 누군가 내게 보여주기만을 바라며 살았다. 내가 나서기 시작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돕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바뀌면 될 것을… 그걸 아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그런데 201호 아가씨와는 어떤 사이야?"
"아, 그냥 오빠 동생 사이에요."
"그새 연애를 한건 아니고?"
"아니에요. 집 고쳐주다가 친해진 것뿐입니다."
"그 아가씨 일 잘하던데, 자네는 그 아가씨 어떻게 생각하나? 둘이 잘 맞을 것 같던데."
"그런 사이 아니에요."
"내가 저쪽 건물 청소하는 거 CCTV로 잠시 봤는데 아주 성실하더라고. 결혼은 했던가?"
"남편의 술과 폭력 때문에 결혼하고 1년도 못 살았더라고요. 이혼하고 혼자 산 지 5년 정도 됐어요."
"상처 있는 사람끼리 기대며 사는 것도 좋지."
"열 살이나 많은 제게 너무 과분해요."
수영이가 청소한다고 했을 때, 걱정이 많았다. 덜렁대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몰랐다. 사람을 믿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다만 형님이 나를 믿어준 것처럼 믿어보기로 했다. 석동이 형이 가구점을 할 때처럼 모든 걸 맡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청소를 따로 떼어 수영이에게 전담시키기로 했다. 자기 일이 되면 더 열심히 일할 거라 믿었다. 운전면허도 따고 앞장서서 알바 아줌마들을 리드하며 적극적으로 사업에 임했다.
"오빠 덕분에 제가 세상 사는 맛이 나요. 참 감사한 사람이에요."
"착한 사람에서 진급한 건가?"
"네?"
"아니야...."
수영이는 나를 볼 때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착하다는 말보다 감사하다는 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뭔 돈을 이렇게 많이 보냈어?”
“어.. 일이 잘 풀렸어. 장모님에게 빚진 거 갚은 거야. 양육비는 매달 늦추지 않게 보낼게."
"아니야. 이제 양육비 보내지 마. 이제 됐어. 당신이나 잘 추슬러."
"그래도, 소연이 내 딸인데, 아빠 노릇해야지."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행이네, 많이 변했다는 말 들었어. 그런데 이젠 좀 불편해. 남에게 돈 받는 거 같고."
"그렇구나, 이제 연락하지 않을게 대신 양육비는 매달 보낼 테니까 소연이 앞날에 써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아내에게 무슨 말이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혼을 한 건지? 남자는 누구인지? 꼭 재혼해야 했는지? 내게는 그건 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
“소연이 대학 공부까지 내가 책임질 테니까,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살아.”
“그래, 당신이 잘 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