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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금싸라기 10화

복숭아밭 - 뜻 밖의 소식

by 행동하는독서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마지막 아버지 형제가 세상을 떠나셨다. 얼굴 못 뵌 지 20년도 넘어서 그런가 마음은 무덤덤한데 장례식 참여 여부가 애매했다. 장지까지 가야 하는데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저녁만 장례식장에 있으면 되는 건지 내일까지 있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사촌이라고 별로 왕래도 없었으니 가봐야 어색할 뿐이다. 이럴 때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어미니 장례식 때 나보다 5살 많은 석현이 형은 혼자 참석했다. 그나마 장지까지 오지도 않았다. 사업이 바빠서 이틀이나 비우기는 난처하다고 했다. 형 부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걸 따질 형편도 아니었다. 다 망한 집에 뭐 볼 거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작은 아버지는 땅을 잘 가지고 계셔서 그런가 나름 풍족하게 살았다. 작은 아버지께 도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내가 망했을 때 연락도 한번 안 하신 분이다. 내가 넉살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찾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형은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혹시 형의 소식을 알고 있을까?


장례식에 참여했다. 서울에서 사업하는 석현이 형은 머리에 이대팔 가르마를 타고 반지르르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서울에서 중견기업 운영한다더니 잘 되는 모양이다. 아버지가 돌아신 자리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너 일 잘하고 있단 말 들었다.”

“형에 비하면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지… 뭐.”

“그래도 그 바닥에서 일어선 거 대단한 거다.”

언제는 다시 볼 거 같지도 않은 형이 내 칭찬을 하다니, 뜻밖이다. 성공이란 사람을 찾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나 보다. 내가 사람들에게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집안 다 말아먹은 동생이 편할 리는 없을 테다. 이제는 어딜가도 명함 내보일 정도는 되는가 보다. 아는 척을 다 해주고.

"혹시 석동이 형 소식 알아?"

"석동이형 온다고 했어. 너도 오랜만에 만나니?"


언제 일어설까 고민하는데 석동이 형이 장례식에 들어왔다. 20년 만에 만나는 형인데 서먹했다. 그냥 나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형이 내 앞에 다가왔다.

“앉아도 되냐?”

“어, 그래. 잘 지냈어?”

형은 서울에서 친구들과 동업을 한다고 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만 한다고 했는데 형수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별로 궁금한 게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데 석현이 형이 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두 사람 너무 어색하다. 자 한잔해.”

겨우 술잔을 들었을 때 석현이 형이 말했다.

“석동이형, 장례 끝나고 석정이랑 우리 집에 한번 와. 할 말이 있어. 아버지가 유언장을 남기셨어.”

석동이 형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작은 아버지가 우리에게도 뭘 남기셨니?"

"형, 그건 그때 이야기하자고, 지금은 장례식이야."

석동이 형은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돈 냄새를 맡는 특별한 기관을 가지고 태어난 모양이다. 그런데 돈을 버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다. 검은 양복이라고 입고 왔는데 낡고 무릎이 툭 튀어나와 보였다. 형의 20년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장례 끝나고 보자 했는데 장지를 가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 산소 밑에 작은 아버지를 모시고 산을 내려왔다. 겨울이라 모두들 오래 있고 싶지 않아 보였다. 형과 형수, 변호사라는 사람과 마주했다. 변호사라는 사람이 대강 훑어보는 듯하더니 유언장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고인께서 유언장을 남기셨는데요. 아드님께 전 재산을 상속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신 형님에게 신세 진 것도 있다시며, 재산의 10%를 석동, 석정 두 분께 남기셨어요. 그래서 석현 아드님께서 여기 보이는 산을 두 분께 양도하려 합니다. 동의하시면 사인해 주세요."

변호사는 등기부 등본을 보여주었다. 대강 봐도 별로 할 것 없는 산으로 보였다. 석동이 형이 나섰다.

"석현아,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말이야, 아버지와 저기 보이는 논으로 농사를 진 기억이 있어. 그게 그때는 우리 땅이었나 봐. 그런데 언제부터 작은 아버지가 벼를 심으시더라. 아버지가 주신 땅은 그거 아니야? 논으로 받고, 산으로 주는 건 무슨 심보야?"

석현이 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석동이 형 난 그런 기억 없어. 원래 다 아버지 땅이었어. 난 아버지가 남기신 대로 행동하는 거니까, 받으려면 받고 아니면 말고, 결정해. 다른 소리 하지 말고, 여기 쓴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석동이 형은 먼 산을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무튼, 고맙구나 사촌. 넌 작은 아버지 닮아서 잘 살 거야! 석정아 사인하고 가자."

석동이형은 사인을 하고 볼펜을 내앞에 던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사인했다. 형들이 보는 막내는 그래야 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철모르는 동생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작은 아버지가 남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닌가? 이대로 사인하고 돌아서면 석현이 형을 장례식에서 향 냄새 맡으며 사진으로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친 형제도 돈으로 얼룩졌는데 사촌이라고 자기 욕심이 없을 텐가.

석동이 형이 문간을 나가다 석현이 형에게 물었다.

"넌 그 논으로 뭘한건데?"

"이제 이 동네 남은 가족도 없고 다 팔아야지, 누가 농사 짓겠어."

이제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외로움이 찾아왔다.


등기를 마친 후 석동이 형이 말했다.

"나, 이거 바로 팔아버릴 건데, 같이 팔래?"

"아니, 난 거기다 과수원이나 하나 만들어 볼래."

"그럼, 내 땅 살래?"

"그래 그럼."

"너, 돈 있구나? 형 좀 빌려주라."

형은 여전히 내 돈을 자기 돈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제 그만하지. 20년 전의 내가 아니야. 형이 판다면 가격은 좋게 쳐줄게."

"이 자식은 20년 전 이야기를 아직도 갖고 있어. 쪼잔하게."

형의 얼굴을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넌 그게 아무것도 아니냐? 내 인생이 다 틀어졌는데?"

처음으로 형에게 반말을 했다. 형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짜식 많이 컸네, 너한테 팔께. 형이 더 알아보면 비싸게 필 수도 있는데 동생이니까 그냥 저렴하게 넘기는 거야. 넌 과수원이나 하는 게 제격이야. 그 땅으로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 같은 줄 알아?'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차갑게 내리눌렀다. 작은 동네 구멍가게 치킨집도 성공 못 시킨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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