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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금싸라기 11화

복숭아밭 : 주인이 되다

by 행동하는독서


형과 특별할 것 없는 매매를 끝냈다. 조용한 동네 다방에 앉아 커피를 한잔했다.

"뭐야? 세금 내고 나니까 남는 것도 없잖아. 석현이 이 자식은 정말 나쁜 놈이야."

상속세를 내고 형에게 돈을 지불하고 보니 그나마 조금 모았던 돈도 사라졌다. 석현이 형은 우리 형제가 다 망했으니 뭘 주어도 감지덕지할 거라 생각했을 테고. 석동이 형은 내가 세상 물정 몰라 쓸모없는 땅을 제대로 넘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들에게는 이래저래 나는 어리숙한 동생 이상은 아니었으니까. 그게 내가 걸어온 삶이었고, 인생 자체였다.


소주 한잔하자는 말도 없이 석동이 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방 문을 열고 나가는 형에게 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조카는 있는지, 형수는 뭐 하는 사람인지, 뭘 하고 다니는지도 묻지 않았다. 미국에 있을 누나와 연락은 하는지도 몰랐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누나가 있는 미국으로 가보고 싶어졌다. 조카들은 이미 시집, 장가를 갔을 텐데... 다 떠난 이 동네에 이제 나만 홀로 남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그나마 이룬 가족도 모두 떠났다. 정말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라 생각했는데, 그 어쩔 수 없음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다. 나만 탓하며 살았지 내 운명을 뒤엎어 볼 만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운명이 찾아오는 그대로, 나를 휘두르는 그대로 맞으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 운명에 맞서고 싶었다. 내 의지대로 살아온 적이 없었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방향대로 나아가고 싶었다.


정수 형님에게 도움을 구했다. 산을 깎아 복숭아밭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정수 형님과 산 정상에 올랐다. 시원하게 터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봄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어올라 왔다. 저 멀리 형님의 복숭아밭이 보였다.

"자네 꽤나 똑똑해졌는데. 석동이가 안 판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했어?"

웃음이 났다. 어쩌면 형이 20년 전 내게서 가지고 간 땅보다, 더 큰 땅을 내게 선물로 줬을지도 모른다. 그걸 볼 줄 아는가, 모르는가? 정수형님 덕에 세상 보는 눈이 커진 모양이다.

"형은 팔게 되어 있어요. 땅보다는 돈을 먼저 보는 사람이니까요. 시세보다 10% 더 쳐준다는데 땡잡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동생이 순진한 바보니까요."

"순진한 바보가 많이 변했네."

"형님은 그때 왜 저를 도와주셨어요?"

"복숭아 따는 자네 모습이 애절해 보였어. 농사꾼들이 뭐 할 줄 알겠어. 얼떨결에 돈은 벌었는데 쓸 줄 모르는 농사꾼 아버지들. 우리 아버지는 할 줄 몰라 아무것도 안 했지. 자네 아버지는 뭐라도 해본 것이고, 자네 가족 때문에 우리도 이 땅을 지키지 않았겠나? 자네 가족 아니었으면 우리 아버지도 내 등쌀에 뭐라도 해줬을지 몰라."

오랜만에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저려왔다. 형은 형대로 서울에서 본 게 있을 테고, 누나는 누나대로 욕심이 있었을 테다. 나도 바보 같았고, 어머니 역시 뭘 알았겠는가?

"형님, 여기에 복숭아밭을 만들면 괜찮겠죠?"

"자네는 잘 키울 거야. 복숭아도, 일도, 그리고 가정도."

가정이란 말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께 비밀로 주었던 땅이 40년을 돌아 막내아들에게 왔다.


이 동네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 그 돈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었다. 아니, 우리 가족은 주인이 될 자격이 없었다. 돈은 주인을 찾아 바로 떠났다. 주인이 주인 다워야 하인이 머무르지 않겠는가? 농사꾼에게는 그저 땅을 가꾸는 주인 행세만 있을 뿐이다. 지금 저 땅을 가꿀만한 주인이 되려면 내가 먼저 농사꾼이 되어야 했다. 돌아보면 건물관리를 맡기 위해서 맡기 위해서 공사판, 인테리어, 부동산 기술을 쌓았다. 그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의 주인으로 살려면 내가 먼저 주인이 되어야 했다. 무너진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누나와 형.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다시 내 품으로 데려와야겠다.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이대로 우리는 오해와 미움 속에 살다 갈지도 몰랐다.


계약서에 나온 주소를 찾아 서울에 갔다. 페인트가 벗겨진 2층 현관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 다녀오는 여학생이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머뭇했다.

"누구세요? 우리 엄마 찾으시면 요 앞 식당으로 가보세요."

"어. 그래. 고맙다. 넌 붙임성도 참 좋구나."

돌아서는데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에 백반집이 보였다. 쟁반에 백반을 가지고 오는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이 분이 하나밖에 없는 형수구나.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봉고차 한 대가 빌라 앞에 섰다. 형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내렸다. 모자를 쓰고 먼지 묻은 조끼에 안전화를 신은 모습이 내게도 익숙했다. 나이 먹은 형의 삶도 녹녹치 않았다. 백반집에서 형과 소주잔에 채우며 지난날 이루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수와도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늦게 만나 이제 초등학생 딸을 키운다고 했다. 어린 조카에게 용돈을 쥐여주고 내려왔다.


농사를 짓겠다고 대출을 받아 복숭아를 심고 작은 농막도 지었다. 형님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큰 과수원이 만들어졌다. 올해는 과수가 달리지 않겠지만, 내년부터는 그런대로 나아질 거라 했다. 주변에서는 팔아서 사업 자금으로 쓰지 왜 돈도 안되는 복숭아밭을 만드냐고 했다. 그냥 웃음으로 대신했다. 이상하리만큼 농사를 다시 짓는다는 마음이 뿌듯하게 다가왔다.


장모님께 받은 대출금을 모두 갚았다. 용기를 내어 장모님에게 전화했다.

"자네 수고 많았네."

"아니에요. 장모님의 충고가 없었으면 제가 정신 차렸겠어요? 감사합니다."

"네가 뭘 했다고? 진작에 정신 차렸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네."

"다 제 잘못이죠. 이제 세상 사람에게 갚으며 살겠습니다."

아내의 소식을 물을까 말까 고민했다.

"소연이랑 소연이 엄마는 잘 살아. 궁금하지? 그러니 이제는 자네도 자네 삶을 살아. 떨어져 살면 어떠나? 서로 잘 살아가면 되지."

"네. 장모님도 건강하세요."



수영이를 차에 태워 농막으로 왔다. 아직 결실을 얻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는 희망만 가득한 복숭아밭을 바라봤다.

"언제 이렇게 만들었어? 오빠, 멋지네. 꿈을 이룬 거야?"

"아니야, 내 꿈은 여기가 아니야. 복숭아가 열리고 나면 더 큰 꿈이 달릴 거야."

수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복숭아 농사는 지어봤어?"

"그럼, 형님과 복숭아 지은 게 벌써 3년이 넘었다. 농사꾼 다 됐지."

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붉은빛을 선사했다. 붉은 기운에 복숭아밭이 더 생기있게 보였다.

"여기서 태어나서 죽 여기서 살았다. 땅도 잃었고 가족도 잃었다. 이제는 더 잃고 싶지 않아."

"사장님이 오빠 많이 변했더라고 칭찬 많이 하더라."

"여기가 복숭아밭으로만 보이지? 여기가 금싸라기 복숭아밭이야."

수영이와 처음으로 나란히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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