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받자마자 여자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렸다.
"여기 201호에요. 지금 변기가 막혀서 내려가지 않아요. 빨리 오세요!"
생각할 틈도 없이 관통기를 챙겨 내려갔다. 벨을 누르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변기 막혔다고 해서 왔습니다."
"네? 벌써 왔다고요?"
30대로 보이는 긴 머리 여성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제가 위층에 살고 있어요. 거기에 살며 건물 관리하고 있습니다."
"아... 네. 가까이 살아서 편하긴 하네요."
"잠시 실례할게요."
나는 화장실로 갔다. 아직 내려가지 않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젊은 여성이 얼마나 무안할까?
"일단, 문을 닫고 할게요. 멀리 가 있으세요."
"괜찮아요. 사람 변 처음 보는 것도 아니실 테고. 아침에 막혔는데 저녁에는 내려갈 줄 알았어요. 왜 안 내려가지?"
당돌한 여성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에 당황하지 않을 정도면 보통은 아니리라. 오히려 내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변기가 이렇게 쉽게 막혀요. 지난번에 살던 곳에서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요. 변기 교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매번 이런 식이면 어떻게 살아요? 확 이사 가야 하나? 아저씨, 우리 집만 이렇게 막혀요?"
이 여성의 불만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뭔가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내가 지금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정수 형님은 나의 마지막 희망인데, 세입자들과 부딪쳐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다짐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니요, 저도 관리한지 석 달 됐지만, 변기 막힘으로 전화 온 건 처음입니다. 일단 제가 해결해 볼게요. 기다려주세요."
아무리 관통기를 돌려도 내려갈 기색이 없었다. 이런 건 인분만 들어간 건 아니다. 분명 뭔가 걸렸다.
"변기를 뜯어야겠어요."
나는 도구를 더 가지고 내려왔다. 정화조와 연결되는 부분을 깨고 들어서 이물질을 뺐다. 역시나 하얀 생리대가 걸려 나왔다.
"이거네요."
"저는 버린 적 없는데요. 왜 그게 거기 들어갔지?"
미안해하는 표정을 기대했는데, 너무나 당당하게 자기는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세요."
나는 변기를 다시 세우고 시멘트를 발라 고정했다.
"내일 아침까지는 되도록 사용 자제해 주세요."
"나 지금 볼일 급한데.. 아 귀찮아.. 아저씨 몇 호에 사세요? 화장실 좀 빌리죠."
"우리 집이요? 아... 그러시죠."
처음 본 여성을 우리 집 화장실로 안내했다. 물 내리는 소리가 나고서도 한참 후에 나왔다.
"냄새나니까, 좀 있다가 들어가세요. 향수는 뿌렸어요. 아저씨 참 착하네~ 고마워요. 돈 있으면 맛있는 거 사드세요."
여성이 내려가고 난 후 착하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착한 아저씨라. 그런데 착하다는 말이 순진하다는 말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내가 허술하게 보이는 걸까?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집 앞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새벽 점장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점장님 제가 착해 보여요?"
점장은 나를 보며 눈만 떴다 감았다 반복했다.
"아닙니다. 누가 저에게 착하다고 해서요."
"착하다는 말이 어디 좋은 말인가요? 요즘은 착하다는 말이 만만하다는 말로 들리는 세상이잖아요. 저는 착하다는 말이 싫더라고요. 착하다고 해 놓고 뒤통수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렇군요."
소주가 땡기는 날이다. 그러나 따뜻한 커피로 대신했다. 건너편 4층짜리 원룸 건물이 따뜻해 보였다. 여기도 예전에는 논과 밭이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가 되었다. 저기 어디쯤 아버지와 손잡고 냇가를 내려가던 어린 시절이 보였다. 형과 누나가 학교 가고 아버지 따라 논일, 밭일 다니던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형과 10살 차이 막내로 살며 내가 너무 순진하게 사랑만 받으며 자란 모양이다.
집에 올라왔는 데 문고리에 걸린 비닐봉지가 보였다. 캔커피 두 개가 따뜻하게 들어있었다. 누굴까? 201호 아가씨? 아니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확인은 못했으니 괜스레 호칭을 불렀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냥 201호 세입자라고 해야지. 그래도 말하는 것에 비해 예의는 있는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문자가 왔다.
"어제는 너무 고마웠어요. 밤늦게 애쓰셨어요."
답장을 보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다음에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편의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퇴근하는 201호가 지나갔다. 내가 먼저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는
"커피 맛있어요?"
"아! 한잔하실래요?"
우리는 편의점 야외 의자에 마주 앉았다. 201호는 그날 밤보다 훨씬 차분했다.
"그날 저 엄청 싸가지 없었죠?"
"네? 아니요... "
"여자 혼자 산다고 얕볼까 봐. 제가 좀 오버했어요. 안 그러면 다들 만만하게 보거든요. 강하게 보여야 더 이상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변기 막힌 거 보여주기 싫어서 엄청 애쓰고 고민하다 전화한 거예요. 이해해 주세요."
"이해합니다."
"저는 수영이라고 해요. 저보다 10살은 많으신거 같은데 오빠라고 부를게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었다. 여자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데 나는 너무 되는대로 살았나 싶었다. 나에게 너무 관대했다. 사람들 요구를 맞춰주며 살았더니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더 이상 착하면 안 된다. 착하기보다는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실력과 명성을 갖춰야 한다. 삶이 내게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쉬는 날이면 그녀와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곤 했다. 이혼하고 혼자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입장이 비슷해서 그런지 우리는 쉽게 친해졌다. 억척스럽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