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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동하는독서 Mar 25. 2024

23. 부탁하면서 살아

<행복의 조건>

23. 부탁하면서 살아

배정환


프랜차이즈 회사라서 눈치를 봐야 했다. 다른 빵을 매장에서 만드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다른 거래처를 상대하려면 그에 맞는 다른 매장이 필요했다. 은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부동산을 찾았다.

"30평 정도 되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임대료가 저렴하고 바로 앞에 차를 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변두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곳이야 널렸죠. 기다려봐요. 요즘 경기가 어려워져서 나온 매장이 아주 많거든. 그런데 뭐 하시게?"

"빵 공장으로 쓸려고요."

"그럼 냄새가 좀 나겠는데요. 단독으로 쓸 건물 알아봐 드릴까?"

"아니요. 예산이 부족해서요. 그냥 넓고 싸면 됩니다. 제가 돈이 부족해서 보증금보다는 월세를 더 내는 곳이면 좋고요."

"그거야 주인과 조절하면 되는 문제니까.. 자 봅시다."

은지는 어떻게 돈을 충당해야 할지 망막했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4층 건물의 1층 매장을 소개받았다. 식당을 했던 자리라서 환풍시설도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지만 금방 일할 동선이 그려졌다.

"깨끗하게 철거된 것을 보니 여기 주인도 만만치 않은 사람인가 봐요."

"손님 안몫이 대단한데요. 주인이 좀 까다롭기는 해도 자기 세입자를 보호하는 건 최고죠."

"보호해요?"

"공무원 하다가 정년 퇴직하신 분인데, 세입자가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처리해 주는 편이죠. 건물 앞에 차를 대기라도 하면 즉각 연락해서 물건 들어오니까 차 빼달라고 할 정도예요."

오븐만 들어오면 바로 빵을 만들 수 있겠네... 일단 가계약을 하고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서는 담보만 있으면 대출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은지에게 담보를 댈 만한 건 아파트밖에 없었다. 태성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망막했다. 프랜차이즈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공장을 차린다고 하면 승낙해 줄까? 그러잖아도 사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남편인데 하나 더 한다고 하면 어떻게 나올까? 수민이를 독박으로 봐주는 남편인데, 여기서 더 나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보였다.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 전등이 켜지자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태성이 보였다. 은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불 꺼놓고 뭐 해? 혼자?"

"그냥... 안 힘들어?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오고."

"힘들지. 그래도 해야지. 우리 가족 먹고살려면."

"우리가 못 먹고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해?"

"지금이야 살만하지. 앞으로도 그렇다고 어떻게 장담해. 당신 평생 그 자리 지킬 수 있어?"

태성은 제대로 대구 하지 못했다. 

"당신 주변을 좀 봐봐. 사람들 어떻게 사는지. 다들 준비한다고 난리야. 그런데 자기는 뭐가 그리 여유로워. 남들은 남편이 직장 끝나고 일도 도와준다는데..."

"그럼 수민이는 어떻게 해? 저렇게 아줌마 손에 자라게 하는 게 맞아?"

"다들 그렇게 커!"

"나는 아니야. 그건 아니야. 우리 딸을 남들 손에 크게 할 순 없어.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커야 해."

은지도 수민이 문제만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은지는 옷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사업 문제만 나오면 대화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은지는 잠시 놀이터에 나왔다. 그네에 앉아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다가 미국에 살고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야, 잘 지내?"

"나야 잘 지내지. 은지야, 별일 없이 잘 지내지? 윤서방도 건강하고?

"응 잘 지내, 수민이도 잘 크고 있고."

"가까이 있으면 내가 좀 잘 챙겨 줄텐데, 몸까지 멀리 있으니 해줄 게 없네. 미안하다. 너에게는 항상 미안해."

"언니, 미안하면 나 부탁하나 해도 될까?"

언니에게만은 하고 싶지 않은 돈 이야기를 꺼냈다. 

"걱정하지만, 그 돈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은지야 너 내게 부탁한 거 처음이다. 혼자 악착같이 살지 말고 문제 있으면 부탁도 하고 살아."

그러고 보니 결혼할 때도 언니에게 어떤 요청도 하지 않았다. 혼자 다 처리하고 계획을 세웠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혈육인데도 말이다. 

"윤서방은 뭐라 안 해?"

"그 사람은 만사가 태평이야. 언니... 그 사람과 오래 살 거 같지 않아. 숨이 막혀. 나만 혼자 아등바등 사는 거 같아."

"그래도 착한 사람이잖아. 네가 조금만 이해해. 그리고 힘들면 남편에게 부탁도 하고... 그게 부부지."

"알았어. 언니 고마워."

"내 말 명심해! 사업 잘하고. 멋진 우리 동생."



공장에 기구류가 들어왔다. 오븐, 냉장고, 조리대가 차례로 설치되었다. 장사를 직접 할 건 아니라서 내부 인테리어는 필요 없었다. 사업자 등록을 냈다. 같은 아파트 사는 구청 직원이 은지를 알아봤다. 

"수민엄마. 빵집 문 닫았어요?"

"아니요. 계속하고 있어요. 놀러 오세요. 하나 더 하려고요."

"와! 진짜요? 수민엄마 진짜 사업가네."

"제가요? 아니에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예요."

"나도 수민엄마처럼 사업하고 싶다. 공무원 월급도 별로 안되고 죽겠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별소리를 다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딸까지 보내고 모든 걸 걸었는데 이런 소리나 듣다니. 그렇다고 힘든 내색을 하면 안 된다. 은지는 강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며 웃기만 했다. 잘되는 모습을 보여야 소개라도 해줄 것 아닌가? 세상은 잘되는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은지는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며 스스로를 응원했다. 


은지는 바로 공단으로 향했다. 공장을 돌아다니며 간식으로 쓸 빵을 영업했다. 이미 다른 거래처가 있어 파고드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갔던 곳을 다시 들리며 가격조정을 했다. 

"봉지에 이름만 없지 우리 매장과 같은 빵이에요. 이름 없는 곳에서 받기보다는 브랜드 있는 게 직원들에게도 신뢰 있어 보이잖아요."

총무과 직원이 같은 빵이라는데 관심을 가졌다. 은지는 시내에 있는 매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샘플이라며 빵봉지를 제공했다. 

"같은 가격이라도 이런 빵을 드시는 게 낫잖아요. 싸구려 크림빵보다는"

"그렇기는 한데요, 일단 제안서는 올려볼게요. 연락드릴게요."

은지는 공장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거절받아도, 다음 주에 다시 와야겠어.'

다른 공장으로 향했다. 담당자가 은지를 알아보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결제 보류받았어요. 어렵게 됐습니다."

은지는 빵 봉지를 제공하고 다시 명함을 주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공장으로 향했다. 거절, 다시 거절. 그렇게 가게로 돌아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00 레이저인데요. 잠시 올 수 있으세요?"

은지는 바로 회사를 향해 운전대를 돌렸다. 담당자가 은지를 알아보고 자리를 안내했다. 

"간식 제공하던 곳이 문을 닫는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사장님 내일부터 바로 빵과 우유 제공할 수 있으실까요?"

"그럼요. 내일부터 견적대로 늦지 않게 납품할게요. 감사합니다."

직원이 500명이 넘는 큰 공장이라 매장에서 기다리며 파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계약이다. 경쟁 업체도 나름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버티면 언젠가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을 은지는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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