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슴을 메이게 만드는 부메랑

by 행동하는독서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머리를 쓸어넘기다 하얗게 희어버린 머리를 발견했다.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나도 모르게 한탄이 밀려왔다. 언제 이렇게 머리가 하얗게 되었단 말인가? 달을 헤아려보니 염색한지 불과 석 달쯤 된 모양인데 이렇게나 자라버리다니.


치과를 동행하던 딸에게 물었다. 아빠 그냥 머리 하얗게 하고 다닐까? 하고 말이다. 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이제 6학년이 되는 딸에게 머리가 하얀 아빠가 어떤 의미일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나이 먹은 아빠를 좋아할 딸이 어디 있겠는가? 자식의 의지가 어떻든 간에 새치라고 우길 수도 없는 흰머리는 세월의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이게 다 너희 때문에 생겼다고 우기며 자식 탓으로 돌려보지만, 세월의 무게라는 걸 거부할 수 없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우유급식이 생겼다. 서울우유 200ml 한 팩을 계산해서 한 달 2500원쯤 되었을 것이다. 오전, 오후 반으로 나누어 학교 가던 시절이라 놀다 보면 자칫 점심도 못 먹고 학교에 가는 때도 많았다. 그때 먹던 우유는 얼마나 고소하고 든든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를 졸라 급식 신청을 하고 싶었지만 우리 집안 형편이 그리 녹녹치 않았던 모양이다. 60명의 반 아이들 중에 절반 정도만 급식을 할 정도였으니 서울이라고 해도 여유로운 집안이 많지 않았다.


우유를 먹고 싶다고 조르고 졸랐지만 허사였다. 삐진 얼굴로 학교에 왔다. 그렇게 철이 없던 초등학교 2학년의 막내아들이었다. 2교시쯤 지났을 무렵 친구 하나가 나를 불렀다. 너희 할아버지가 오셨다며 나가보라고 했다. 아버지가 우윳값을 가지고 학교에 오신 게 아닌가? 백발을 가진 아버지, 머릿기름을 바르면 그나마 괜찮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유난히 흰머리가 돋보이던 아버지. 그날 하필 머릿기름도 바르지 않고 오셨다. 내가 늦둥이 막내에다 주름진 얼굴의 흰머리 아버지는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만도 했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한 막내를 보는 부모 맘이 오죽했겠는가? 일부러 우윳값을 마련해 학교까지 찾아온 아버지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 좋겠지만 그때는 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과 2학년이었다. 우윳값보다 더 충격적인 할아버지라는 말은 내 마음에도 비수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큰소리쳤다. 다시는 학교에 오지 말라고.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고. 그렇게 아버지 마음에도 내가 당한 비수보다 더 큰 비수를 꽂았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한 번도 학교에 오시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딸이 흰머리는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아버지께 던진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가 내게도 이어지고 있으니 준대로 당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보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 아버지도 아프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때 아버지 나이가 나보다 더 젊으셨다. 어쩌면 나도 우리딸 학교에서 할아버지가 될지 모른다. 오후에 당장 미용실을 예약했다. 부원장님께 빨리 염색하자고 했다. 딸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섭섭하다고 했더니, 머리 하얀 아빠를 누가 좋아하겠냐고 했다. 나도 안다. 그래 어떻게든 젊게 살아야한다. 우리딸을 위해서, 40년 전 초등학교 2학년 과거의 나를 위해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가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병원에 있다고 했더니 어디 아프냐며, 우리 나이는 아프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 나이란 말이 왜 이리도 듣기 싫을까? 내가 아픈 게 아니라 딸 치과 상담하고 있다고 했더니, 다행이란다. 막내딸이 아직 초등학생이라서 나이 먹은 티 내지 말자고 했더니, 자기는 큰애가 이제 중학교 간다고 한다. 막내가 이제 3학년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픽하고 흘러나왔다. 우리 나이 들어 보이게 살지 말자고, 젊게 살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도 젊게 사시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염색 한번 안 하시고 사신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도 감사한 건 머리숱이 참 많으셨다. 흰머리를 주셨지만 대머리 유전자는 주지 않으셨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버지지만 아버지 나이만큼 되어버린 막내아들이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