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계획을 세운건 아니지만 다둥이 아빠가 되었다. 출산율 저하 때문에 이제는 아이 둘만 있어도 다둥이로 인정한다 하니 셋이면 많아 보이긴 하다. 셋이라서 소소한 다둥이 혜택을 보긴 했지만, 남들이 크게 생각할 정도의 것은 없었다. 큰 아이가 20살이 되었으니 이제는 다둥이 혜택 볼일도 없다. 가장 큰 혜택이라면 6살 차이 둘째, 연년생 셋째 때문에 젊은 아빠라고 착각하는 나 자신을 바라볼 때이다. 부모의 정체성은 아이들의 나이 따라가곤 한다. 젊게 사는 건 나만의 문제를 넘어 아이들까지 영향을 미친다.
내가 아내와 20년 넘게 살고 아이를 셋 낳으며 자부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한 번도 아내 혼자 산부인과를 보내지 않았다. 자유업 덕분에 아이들 출산을 다 지켜볼 수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태어날 때까지 항상 아내와 병원을 동행했고 뱃속에서 커가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정기검진 때마다 옆에서 손을 잡고 아기 심장 소리를 같이 들었다. 초음파검사 후에 간호사 대신 젤을 닦아주고 태아 사진도 직접 받았다. 의사의 지시사항을 같이 들으며 엽산과 철분을 왜 먹어야 하는지 알았다.
큰아이는 저녁에 병원 들어가서 다음날 새벽에 낳았다. 12시간을 아내 침대 옆이 앉아 고통소리를 들으며 첫 산통을 버텼다. 결국 버티다 무통주사까지 맞았다.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큰 아이가 숨을 제대로 쉬지 않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엄마 품에 안겨보지도 못한 아들을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아침저녁으로 혼자 찾아가 인큐베이터 안의 아들을 보며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도 삼킨 양수를 토해냈고 일주일 만에 엄마 품에 안겼다. 태어날 때 그렇게 속을 타게 만들었는데 자랄 때는 크게 아프지 않아 다행이다.
육 년 만에 가져진 둘째가 사내아이라는 말에 착잡했다.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아들 둘이라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그래도 딸이기를 바랐다. 병원에서 크게 태어났는데 힘에 없는 거 같다고 했다. 둘째도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검사를 했다.
"너는 애들을 왜 그렇게 건강하게 낳질 못하니?"
어머니도 안타까워 던진 무심한 말에 상처를 입었다.
"어머니! 애들은 건강해요. 낳는 과정에서 자기가 양수 먹는 걸 어떻게 해요. 그리고 둘째는 키가 커서 또래보다 팔다리에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잖아요."
내가 나서서 대변했다. 조리원에 누워있던 아내는 그 말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그래도 일하는 우리 대신 가장 많이 아이들을 키워주고 보살펴주셨다. 그때는 어머니도 얼마나 애가 타셨을까.
생각지도 않은 셋째가 다음 해 바로 들어섰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처럼 우리에게 왔다. 셋째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덜컥 가져졌다. 가진 건 그렇다 치더라도 성별이 가장 궁금했다. 아들 셋 낳은 엄마, 아빠라는 호칭은 은근히 부담되는 건 왜일까? 딸이기를 은근히 바라고 바랬는데 의사선생님이 좀처럼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셋 다 같은 의사선생님에게 갔는데 그 정도도 알려주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사내아이 둘 가진 친구들이 매달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딸이면 친구도 아내를 설득해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며 막내딸이 내게 다가왔다.
막내는 언제나 애지중지하게 되는데, 아들 둘 다음으로 얻어진 딸은 더 마음이 간다. 나는 누나와 형 다음으로 8살 차이로 태어난 늦둥이 막내이다. 딸을 바라보면 내가 부모님께 어떤 존재였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주변에선 자식보다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더 이쁘다고 말한다. 아직 손자가 없어 그 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조카 덕분에 벌써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초등학생 우리 딸은 난데없이 고모가 되었다. 모임 때 손자를 보면 한결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이뻐할 수는 있는 듯하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기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내와 아이들은 할아버지 존재를 느낄 수 없다. 그나마 외할아버지께서 그 빈틈을 채워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장인어른께서 우리 아이들에게 베푸시는 것을 보면 가끔 아버지가 생각난다.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아이들을 좋아하고 챙기셨을지 상상만 한다. 아마 우리 집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오시지 않았을까 싶다. 조카들 이름도 당신께서 손수 지으셨을 정도로 애정을 보이셨다. 말기 폐암으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시기 전에도 백일 지난 조카만 가면 활짝 웃으시며 통증이 사라졌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며느리 사랑도 남다르셨을 걸로 보인다. 형수가 조카를 낳자 아버지는 꽃다발을 사서 병원에 방문하셨다고 한다. 주변 산모들이 멋쟁이 시아버지라고 엄청 부러워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형수는 아직도 그런 아버지를 기억한다. 아마도 둘째 며느리에게는 더 멋진 경험을 선사했을지도 모른다. 셋을 낳는 동안 얼마나 큰 기쁨과 추억을 선사해 주셨을까?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