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벨 소리와 함께 화면에 딸 이름이 떴다. 중요한 고객과 미팅 중이라 받지 못했다. 재차 전화가 울렸다. 두 번째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내심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큰일은 없겠지? 업무가 끝나고 딸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 너무 배고프다고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딸에게 “다 큰 녀석이 밥도 못 차려 먹냐"라고 핀잔을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면 아이들 끼니 걱정은 덜 만도 한데, 배고프다는 전화에 마음이 짠한 것은 부모라서 그럴 테다.
연년생인 둘째 오빠가 학원에서 늦는 모양이다. 중학생이 되더니 학원에서 오는 시간이 2시간이나 늦어졌다. 불과 한 살 차이라도 오빠와 막내는 생각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막내는 어디에 내놓아도 막내 같은 느낌이 있다. 공부 욕심이 있는 둘째는 수학학원도 자기가 가고 싶다고 자처했을 정도이니 앞으로는 더 늦어질지도 모른다.
큰 오빠는 대학에 갔고, 친구 만날 일도 많아 일찍 들어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막내는 앞으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질 것이다. 그래도 성격이 활발하고 친구를 좋아해서 같이 늦게까지 놀다 들어올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집에 아무도 없게 되는 건가? 어쩌면 우리 부부만 보내는 시간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어수선했던 저녁시간이 한가로운 시간으로 변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큰 아들에게 초등학교 3학년 때 밥하는 걸 가르쳤다. 부모가 조금 늦어도 기다리지 말고 끼니를 해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르치고 보니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 해먹는 것을 넘어 요리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아들은 자격증 시험까지 도전했다. 너무 어린 나이라서 자격증 따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자기가 해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 해먹는 편이다. 가끔은 늦게 들어오는 내게 식사 여부를 묻기도 할 정도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질풍노도의 시간을 무난하게 지나간 것도 감사한데, 가끔 아빠까지 챙겨주는 마음이 있어 안심이다.
나는 누나, 형과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막내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모두 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외롭게 혼자 있는 아이를 보면 짠한 마음이 든다. 형제와 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기억이 많아서 다행이다. 내가 살던 곳은 뒷산과 골목이 발달한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지금은 개발되어 흔적조차 없는 곳이지만, 머릿속에는 그당시 골목의 정취가 생생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한, 개나리가 활짝 피는 집이었다. 사람들은 그 집을 개나리 집이라 불렸다. 동네 사람들 누구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개나리 집이었다. 봄이면 울타리에 노란색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는 집. 차 한 대도 들어갈 수 없는 긴 골목의 막다른 곳에 자리 잡은 덕분에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듯 보이는 집이었다. 리어카로 짐을 실어 날라야 이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골목을 따라 살짝 가파른 길을 들어가면 어두운 담이 그늘을 만들었다. 어느 집이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마당을 중심으로 몇몇 집들이 세 들어 모여살던 곳이다. 지금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인간미가 흘러넘치는 곳이었을 것이다. 어떤 집이 뭘 해 먹는지 다 알만한 그런 곳이었다. 나누고 싶지 않아도 나누어야 했을 것이다.
개나리 집은 나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뒷문을 통해 바로 산으로 나갈 수 있었고, 담장 위에 올라서면 제법 아래쪽 큰길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나는 슈퍼와 새마을 금고가 있는 큰 길까지 보이는 담장을 좋아했다. 담장 옆으로는 개나리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큰 키의 대추나무가 있었다. 대추나무에 올라가면 더 잘 보였을 텐데, 내가 오르기에는 너무 높았다. 내가 자주 올라가던 담벼락에는 텃밭으로 나가는 작은 쪽문이 있었다. 그 작은 문을 열고 밭을 가로지르면 소나무와 아카시아 나무가 가득한 뒷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었다. 그 밭에서 개미를 잡아 병에 넣고 개미집을 관찰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없던 날은 그렇게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가끔은 혼자 마루에 누워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며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을 찾아낸 적도 있다. 텃밭에서 뱀이 나온 것을 목격한 이후로는 밭에 가는 게 무서워서 피해 다니기도 했다. 처마 밑에 제비집을 보며 저 안에는 알이 들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골목마다 낮게 날아다니는 제비 때문에 깜짝 놀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그 많던 제비가 어디 갔는지 이제는 통 보이질 않는다.
하루는 배가 고픈데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담장에 올랐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빛에도 담장에 앉아 멀리 보이는 큰 길에 아버지가 오시기만을 기다렸다. 혼자놀기에 지친 7살의 막내가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때의 내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도 애잔하다.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면 그 높은 담장을 뛰어내려 아무 일 없듯이 집안에서 기다리는 척했다. 담장에 올랐다고 하면 혼났을 것 같으니, 혼자서도 잘 노는 착한 아들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나 보다. 집에 혼자 둔 막내를 걱정하던 아버지의 발걸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입이 너무 심심할 때는 찬장에 올려진 커피 프림을 꺼내 먹곤 했다. 프리마라고 하던 가루가 분유처럼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입안에 털어 넣고 한참을 빨아먹곤 했다. 한 번은 찬장을 향해 연탄불 아궁이를 건너가다 사고가 난 적이 있다. 연탄불 덮게 위에 넘어지며 무릎 한쪽이 닿아 화상을 입었다. 지금도 500원 동전만 한 화상 때문에 반지르르하게 변한 피부를 볼 때면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막내를 혼자 두고 일 나가신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셨을까?
막내가 배고프다고 전화가 오면 나처럼 화상을 입지 않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집에 가스 기구는 쓰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 그런 아이들이 곧 중학교 가고, 스스로 라면이든, 밥이든 해먹는 것을 보면 이제는 다 컸구나 싶다. 아이들을 향한 걱정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다행이라는 마음과 아쉬움이 마음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