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아들의 불편한 동행

by 행동하는독서

아파트 정문은 매일 아침 엄마와 아이들로 북적북적한다. 노란 차! 멀리서 커다란 노란 버스가 다가오면 엄마들은 일제히 아이들 손을 잡고 모여든다. 엄마들은 들고 있던 가방을 아이들 어깨에 메주고 선생님 손에 아이를 맡긴다. 어린이집이 얼마나 크길래 중형버스를 어린이집 차로 운행할까? 우리 유치원은 작은 봉고차에 비교되는 듯 하다. 아이들이 타고나면 엄마들은 자기 아이를 찾아 손을 흔든다. 버스가 떠나고 나면 엄마들은 마저 못한 수다를 떤다. 매일 아침마다 보는 얼굴이지만 특별히 인사 조차도 못한 아주머니들이다. 같은 어린이집이면 벌써 인사를 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직은 어색하다. 우리 아이들만 남아 차를 기다린다.


노란 승합 봉고차가 사거리에서 돌아 나온다. 연년생 두 아이를 태우기 위해 나도 준비한다. 은근히 엄마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어린이집을 보내는지 궁금해할 것만 같다. 우리 아이들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 어린이집이 멀어서 집에 오면 저녁 7시가 넘는다.


갑자기 멀리 이사를 하며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이집을 바꿔야 할지 고민했는데 기꺼이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다. 10킬로 넘는 거리를 수고해 주시겠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큰애 때부터 보냈던 어린이집이고, 저녁까지 아이들을 돌보아주니 우리 부부에겐 더없이 좋았다.


오전 8:30분, 남자들은 출근해 있을 시간에 나는 아이들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선다. 뛰다가, 놀다가, 산책하는 강아지를 보느라 바로 정문까지 나가지 못한다. 놀이터가 비어 있으면 그네를 밀어주다가 자주 시계를 본다. 아직 5분 정도 남았지만, 일찍 나가봐야 엄마들끼리 수다떠는 낯선 분위기에 맞닥뜨릴 게 뻔하니 그냥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차라리 편하다.


식사 차리고, 화장하기에 바쁜 아내를 위해 아이들 어린이집 배웅은 거의 내가 했다. 어머니가 집에 오시는 날을 제외하곤 내가 나갔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은 아내를 위한 배려 같았고,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아빠를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과도 같았다. 보통의 아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아빠와 추억이랄까?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영상으로 남긴다. 수시로 찍어 두었더니 이제는 가끔 돌아보는 추억이 되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일찍 집에 들어간 날, 내게 연락이 왔다. 아이들 데리고 놀이터에 나갔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엄마 맞냐고 묻더란다. 매일 아빠가 아이들 데리고 나오길래 엄마가 없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인가? 나도 모르게 동네에서 홀아비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날은 동네에서 아내의 존재를 알리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출퇴근에서 자유롭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집을 갈 수 있었다. 이유야 다르지만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것에 감사하다. 아이들이 빨리 커서 혼자 학교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너무 커 버렸다. 얼마 전 비행기 태워달라는 막내를 들다 허리 삐끗하는 줄 알았다. 여자애인데도 이제는 함부로 들기에 버거워졌다. 더 이상 그네를 밀어줄 일도 없다. 친구들이 좋다고 매일 통화하고 나가놀기 바쁘다. 그래도 아빠와의 작은 추억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국민학교 1학년 소풍가는 날, 매일 뛰어놀던 뒷산으로 소풍을 갔다. 구두를 신고, 무릎까지 오는 긴 타이즈에 반바지를 입었다. 비닐 스케치북 가방을 손에 들고 새로 산 소풍 가방을 등에 맸다. 아버지는 구두를 신으셨고, 정장 바지를 입고 계셨다. 회색 점퍼 차림은 실제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어떻게 세세한 것까지 기억할까?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 덕분이다. 아버지가 소풍을 따라오셨다. 다들 엄마와 왔는데, 나는 아버지와 소풍을 갔다. 사진사 아저씨에게 돈을 주고 소중한 사진을 찍었다. 웃음기 없는 부자가 차렷 자세와 앉은 자세로 말이다.


어머니 대신 아버지와 온 소풍은 어린 내게도 타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셔서 아버지가 대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좀 아프셨다. 어쩌면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때였다. 먹고살기 바쁜 시절이라 어머니는 막내 소풍이라고 시간을 뺄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큰 아이 초등학교 들어가고 학부모 교육을 내가 갔다. 엄마로 가득한 자리에서 아빠는 나 혼자였다. 자기 아이들 자리에 앉았는데, 우리 아들 자리가 맨 뒤라서 그나마 눈길에서 벗어나 다행이었다. 한참을 이야기 듣고 선생님과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었다. 생각보다 별로 뻘쭘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엄마들 틈에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아버지도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아들인 나만 어색한 소풍이었나 보다. 나는 아버지와 소풍 간 그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을 보고 회상해 보니 독특해서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남들은 같이 오지 못하는 아버지와의 소풍을 즐겼으면 좋았으련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국민학교에 4학년쯤이다. 아버지가 내 보온 도시락에 뜨거운 숭늉을 넣다가 그만 당신 다리에 쏟고 말았다. 화상 거즈를 붙이고 새살이 돋았지만 얼룩진 피부는 흉터로 오래 남았다. 자녀의 도시락을 챙기는 것이 부모의 의무였던 시절이다. 학교를 바래다주지는 못하셨어도 준비물을 챙겨주시는데 모자람이 없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새삼 그립다.


아빠가 되고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 바램이 생긴다. 아빠와 어린이집 차를 타던 때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아이들이 가져보지 못한 아빠와의 추억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원장님께서 어느 날 내게 부탁하신 적이 있다.

"아버님! 아무리 바쁘셔도 직접 한 번씩 데리러 오세요. 아이들은 아빠가 데리러 오면 은근히 자랑스러워합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려고 더 노력했다. 엄마들 틈에서 아무렇지 않은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어머니와 소풍온 아이들 틈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오히려 자랑스러웠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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