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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Apr 02. 2019

나는 무엇을 써야 할까?

소재는 떨어져도 글은 쓰고 싶고 대박도 나고 싶고

       

큰일이다. 소재가 떨어졌다. 한 사람은 한 권 분량의 책을 쓸 만큼의 인생을 산다더니 회사에 있으며 느꼈던 것들을 적은 [괜찮아, 어차피 얼마 못 받아/https://brunch.co.kr/magazine/alwaysquit]를 매듭짓자 당장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확히 하자면 소재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가족과 여러 친구에 의한 관계, 만연하게 겪어온 차별, 이러한 것들로 내가 깨닫고 실천한 것들에 관해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서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앞선 매거진은 무슨 기적인지 주제 하나를 떠올리면 당시 상황과 나의 견해, 얽히고 참아온 감정 따위가 매끄럽게 연결되었는데- 지금은 같은 주제로 쓰다 만 에세이만 두 편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자로 풀어놓으니 불분명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기를 좋아했지만 그만큼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고 중학교에 올라간 후 과학의 날 대회에서는 물감을 사용하기 번거로워서 산문을 선택하는 정도였다. 작가의 꿈을 품기도 했지만 열여섯에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해 좋은 직장의 사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자 머릿속에서도 흐려졌다.


그 장래 희망을 복기한 건 한 친구를 만나 한 작품에 빠져 열렬한 덕질을 시작하고, 직접 2차 창작에 나서 팬픽션을 쓴 후 사이트에 업로드 한 뒤였다. 운이 좋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지금은 읽기도 힘든 흑역사다- 나는 무언가를 써서 누군가가 읽어주고 내가 만든 이야기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때의 쾌감을 알아버렸다.


흔히 구분하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며 가리지 않고 쓰고 있지만 소설이란 그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한밤의 감성에 취해 휘갈긴 글은 몇 주 뒤에 봤을 때 명작이거나 졸작이었다. 이런 표현을 어떻게 썼지, 다시는 못 쓴다-고 좌절하거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폐기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거나.


호기롭게 유명 신인문학상에 작품을 투고했다가 떨어진 후 근거 없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내가 진짜 재능이 없는 거 아닐까, 고민하며 과거의 소설을 읽어 보니- 음, 떨어질 만 했다. 겨우 몇 주 간격으로 자기객관화가 더 잘 된 거다. 예전에 쓴 놀랍도록 수려한 문장을 볼 때면 다시는 못 쓰겠군, 과거의 나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이건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게 매번 던지는 습관이었다.


맥락이 없거나 등장인물이 얄팍하거나 문장이 미숙하거나……. 여러모로 부족한 이야기를 너무 사랑했다. 이게 문제일 수도 있다. 스스로 짜내는 글의 분위기와 색감이 철저하게 내 취향으로 짜여있어서 잠재적 독자를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8주짜리 글 수업을 들은 게 다인 비전공자의 추측엔 한계가 있고 난 여전히 내가 만드는 비슷한 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아직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세계에 이름을 알릴 거라 믿으며.     


그런 면에서 에세이는 훨씬 쉬웠다. 주인공은 항상 같았고 내용도 확실했다. 가상의 사건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감정을 지금과 엮어 조립하면 되었다. 그건 사막의 모래로 집을 쌓는 것과 정갈한 땅에 벽돌을 올리는 것만큼 큰 차이였다.




에세이는 일기와 비슷하게 내가 살아온 해만큼 겪은 일을 비슷한 카테고리로 묶어 공통된 언어를 풀어내면 된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내가 올린 에세이가 부끄러워 머리라도 깨고 싶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현재를 잘 정리해 나타내려 노력한다.


그런데 회사라는 소재거리와 고민이 넘쳐날 수밖에 없는 공간을 벗어난 나의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유명세도 독특한 이력도 없는 내가 무수한 글 틈에서 얼마나 잘 버티고 성장할 수 있을까. 지금은 글을 규칙적으로 올린다는 거에 의의를 두려 정신승리를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난 관심에 목말랐다. 물론 비난은 아니야, 그걸 줄 거면 그만큼의 지지층도 줘.


브런치를 이용하면서 느낀 건 구독자를 늘리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고 댓글이 있는 건 심해에서 스펀지밥을 발견하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조회 수가 천이 넘어 알람이 울린 적이 있었는데 포털 사이트에 잠깐 노출이 되었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중요한 건 그 내 글을 많은 사람이 읽었다는 거고 그 사실이 나를,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되새겨주었다.


발레 수업을 가는 길에 갑자기 치솟은 조회 수를 보며 깨달았다. ‘아, 난 글을 쓰고 살아야하구나. 안 그럴 수 없구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취향의 뮤지컬을 봐도, 학생 때 좋은 성적을 얻은 기억을 복기해도 내가 쓴 이야기로 이룩한 성취-아직은 성취라고 말하기도 멋쩍은 수준이지만-가 준 기쁨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난 다채 이야기 속에서 살고자한다. 현실에 발붙이지 않고 몽상에만 빠져있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 메시지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힘을 가진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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