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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Apr 23. 2019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_(上)

함가맨은 소비를 참지 않아

        

큰일 났다. 돈이 없다. 


생각해 보면 내 짧은 생애에서 풍족했던 시기는 몇 없다. 시기보다는 시점에 가까운 건가. 그러면 대체로 돈이 없는 나는 대부분 큰일이었나? 그건 아니다. 

빈 잔고가 심각하게 위협이 되었던 건 자취를 시작했을 때부터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내가 내일 없는 덕질에 충실한 게 첫 번째 이유고 월세 40만원을 내야 하는 일인가구로 살아가기엔 월급이 너무 적었다. 누군가는 당시 월급의 액수를 들으면 그것만 해도 어디, 냐고 할 수 있지만 노동력에 정당한 가치를 지급하지 않는 게 효율적이라는 사고가 팽배한 사회에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내가 많이 쓰는 게 아니라 회사가 적게 주는 거다.     


여하튼, 중요한 건, 내가 돈이 없다는 거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들어오는 돈보다 빠지는 돈이 많거나 동일할 때 발생한다. 신용카드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비상금도 없이 모아놓은 자금을 야금야금 까먹는 기분은 즐겁지 않다. 소비는 행복하지만 재벌도 아니고 후폭풍 걱정 없이 통장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은 본가에서 생활비도 내지 않고 짧지만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는데 왜 돈이 없을까? 명료했다. 무언가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자유로운 외국어 실력을 열망했다. 현지인처럼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을 동경했다. 처음에는 영어였고, 일본어였다가, 중국어까지 왔다. 물론 바라던 만큼 유창하게 할 줄 아는 말은 하나도 없지만.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난 반강제적인 교육에 익숙해진 인간으로서 집에는 문법, 독해, 영어단어장이 쌓여 있고 하다만 구몬 학습지와 일본어 기초 교재가 미뤄져있지만 자기주도적으로 끝을 보지는 못했다. 

나는 번번이 실패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학습법을 강구한다. 회사 근처에 작은 회화 학원을 다녔다가 전화영어를 신청했다가 지인에게 과외를 받았다가 서울 규모의 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받은 다음 날 수강 등록을 했다.


나는 도전하고 미뤄두고 아예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나태한 만큼 끈질기고 몸을 편히 내버려둘 정도로 게으르지는 못하는 거다. 계획만 있는 중국어나 머리에서 오래 지워둔 일본어는 차치하고- 영어, 이놈의 영어. 열 살 때 시작해서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애증의 제1 외국어.


어떤 외국어든 혼자서 요령껏 레벨 업 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후자다. 자본에 물든 반강제적 수업 방식에 최적화되어있기도 하지만 내가 듣고 말하기에 능숙해지고자 하는데 나 혼자 뭘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감을 못 잡는 문제가 컸다. 물론 수많은 사람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여러 수단으로 똑똑하게 공부하겠지만 내가 못 그러는 걸 뭐.


처음엔 혼자 영어 기사를 해석하며 공부했지만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한때는 내가 자기 주도적이라고 착각했던 적도 있었지. 




그러다 이번 달, 벚꽃이 흩날리는 봄에 미뤄두고만 있던 일대일 영어회화 시범 레슨을 신청했다. 그건 촘촘한 계획이 아닌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선택이었다. 


나는 통장에 치명적인 선택을 충동적으로 할 때가 있다. 절판된 만화책을 세트로 살 때 그랬고, 좋아하는 뮤지컬을 배우별로 보기 위해 그랬고, 대형서점 홈페이지에 장바구니만 했던 책을 한 번에 주문할 때 그랬다.


‘그냥 한 번 해보자’는 함가맨이 그렇지 뭐…….     


세심한 커리큘럼과 극찬으로 가득한 후기를 보면서도 일대일 레슨을 미뤄왔던 건 한 회에 오만원이 웃도는 수강료 탓이었다. 몸과 마음이 편하다 보니 뇌의 회로가 단순해진 건지 ‘별로면 정기수강 신청은 안 하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범 레슨을 신청했다가 50분이 짧게 느껴지는 놀라움을 경험했다. 유쾌한 대화와 수업이 끝난 후 받은 세심함에 매료되어 곧장 정기 수강을 신청했다. 


미리 밝히건대 광고가 아니다. 어쨌든, 알바비의 절반쯤 되는 영수증을 메일로 받으니 허탈하면서도 뿌듯했다. 그때는 첫 알바비도 받기 전이라 알토란처럼 쟁여둔 다른 통장에서 돈을 지출했다.      


내가 한 번에 목돈을 쓰는 큰 이유는 책과 뮤지컬 따위의 문화생활이거나 무언가를 배울 때였다. 어쩌다 블루스크린이 차단되는 필름이 붙었거나 그런 소재로 제작된 안경일 때도 있었고 취향의 옷가게를 발견해 홀린 듯 지른 적도 있었지만. 


술이나 담배처럼 건강을 해치거나 도박처럼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중독이 아니라 건전한 자기계발에 투자해서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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