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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Apr 23. 2019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_(下)

서울공화국_놀랍게도 서울이 아닌 곳에도 사람이 산답니다. 몰랐죠?


나는 배우고 싶은 게  있었다. 항상.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언제나


중고등학생 때부터 체계적인 글 수업을 듣고 싶었고 미술도 깊게 들어가 보고 싶었으며 취업을 한 후에는 다양한 외국어뿐만 아니라 젠더학, 여성학, 동물권과 관련된 여러 강의, 포토샵 등을 이용한 사진 보정, 사진 촬영, 책이나 잡지의 겉과 속을 디자인하는 법, 동영상을 편집하고 자막을 넣는 법, 기초적인 코딩까지-


욕심은 많았고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았고 혼자 인터넷을 뒤져 맨손으로 긁어내기에 지친 나는 근무지가 서울로 옮겨지고 적응이 되자마자 망아지처럼 돌아다녔다. 작년의 캘린더는 약속이 없는 날이 없었고 주말에는 두 개씩 수행하기도 했다.


의식주 중 의과 식을 포기해서라도 다양한 활동에 빠졌다. 발레를 시작하고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틈틈이 촬영을 다녔고 소설을 쓰는 법을 배우고 합평을 하는 짧은 강의를 수강하기도 했으며 오 개월은 영어학원의 수업을 들으러 잠실과 을지로 강남을 돌아다니다 과외도 받았다가 뮤지컬을 보러 퇴근하자마자 혜화역이며 삼성역으로 달려갔으며 틈틈이 작가와의 만남에 응모해 책을 붙들고 감격에 겨워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회사가 무너트린 일상을 복구하려는 의지였다. 지금 그때의 기억을 되짚으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부드럽게 미화됐지만. 그때는 순간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곧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를 깨곤 했다.

여하튼 난 배우고 싶은 게 항상 많은 사람이었고 그 성향이 경제가 죽어버린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해서 달라질 리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 상황이 바뀌었다 해도 결국은 내가 영향을 받고 만다.


배울 돈이 없는 것과 배울 곳이 없는 것. 어느 게 더 끔찍할까? 지금의 난 둘 다지만 배울 곳이 없는 게 더 화가 난다. 돈은 어떻게든 벌어보면 된다 쳐도 그 문화지구를 내가 구축할 수는 없으니까.

왜 없냐고?


여기는 서울이 아니니까.     




처음 인프라의 격차를 체감한 건 중학생 때였다. 한창 청소년 대상의 문학 공모전을 찾아볼 시기에 문예 창작(이하 ‘문창’) 학원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수도권 외에는 한 곳도 없었다. 정말 한 곳도! 제2의 수도라는 부산조차! 서울이 아니면 인천, 부천 등 서울을 중심으로 전철이 다니는 지역이었다. 조금 넓어져봤자 경기도. 


월 수강료가 백을 찍기도 한다는 문창학원을 그때의 형편으로는 다닐 수도 없었겠지만 나의 의지나 사정과 상관없이 시도조차, 상담조차 받지 못한다는 건 전제가 달랐다.


그 다음은 뮤지컬이었다. 알음알음 받은 장학금으로 가끔 지방으로 내려오는 라이센스 뮤지컬-레미제라블, 엘리자벳 등-만 보다가 친구의 권유로 서울에서 하는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의 충격이란. 그렇게 많은 뮤지컬이 그렇게 많은 극장에서 하는지 몰랐다. 그렇게 중소극장에서 하는 극의 맛을 알아버린 나는 토요일 아침버스로 올라가 그날 저녁 버스로 내려가는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그러니 서울에 산다는 건 그 복잡하고 반짝이는 인프라를 눈앞에서 직접, 일일이, 사소한 만큼 세밀하게 절감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구역별로 경찰서와 소방서가 수두룩했고 버스와 전철은 자정이 넘어서도 달렸으며 재미난 강연과 모임은 날짜가 겹쳐서 포기해야 하는 게 생길 정도로 많았다.

택의 여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러 작문 강좌 중에,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 중에, 뮤지컬과 연극 가운데 고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재벌도 부르주아도 로또 1등에 세 번 정도 당첨된 사람도 아니니 ‘이거 빼고 전부 다’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기회가,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넓은 특권이었다.


하다못해 청년들을 위한 정부 정책조차 수도권에 우선 시행되지 않는가. 구직자를 위한 새로운 제도를 안내하는 글을 보면 서울이나 경기도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이 나를 좌절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그런 안내 문구만 봐도 서울 아니면 경기도겠지, 하고 당연히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그 특정한 조건을 볼 때마다 씁쓸해지는 것까지 무던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가령, 지역에 상관없이 자격만 되면 공평하게 제공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국비 지원 교육도 학원이 없으면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단적으로 나와 같은 지역에 살던 사촌은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학원이 없어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이게 뭐람.


시작은 공평하지 않다.

 

당연히 수도권 내의 학교를 나와 직장을 구해 풍부한 문화를 누리며 사는 이들이 있고, 대부분의 카메라는 이곳의 삶에 초점을 둔다. 성적이나 능력이 되어도 수도권의 대학을, 직장을 고려조차 못 하는 삶은 여전히 존재한다. 


재난이나 다름없는 더위가 연이어 찾아왔어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같은 더위가 찾아오자마자 연신 뉴스에 보도되었다.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무관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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