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도 배우고 싶은 게 있답니다.
앞서 말했지만 난 배우고자 하는 게 굉장히 많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간극이 날 슬프게 한다. 돈만 있다면 지구 반대편에라도 가서 원하는 전공을 공부할 수 있는 2019년이지만 지방의 가난한 20대에게 풍요로운 지식의 장은 사치를 넘어 불가능에 가깝다.
대한민국은 사교육의 성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돈으로 꾄 금줄과 마찬가지다. 나는 어디서 지식을 얻고 교류할 수 있는가.
거듭거듭 말했지만 나는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해 3학년에 공기업에 합격해 열아홉 여름부터 직장인과 고등학생이라는,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하지 않는 이중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을 고른 아이들도 있었지만 일찍이 돈을 벌어 자립하려는 욕망을 가진 내가 굳이 입학할 때의 결심을 바꿀 계기는 없었다.
인문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국영수가 아닌 회계 따위를 배우며 여러 프로그램을 익혔고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때는 교내 방과후 프로그램만 열심히 수강하면 통상적으로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격증을 달 수 있었고, 정 급하면 학교 근처의 컴퓨터회계 학원에 단기로 바짝 다녀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지금 졸업하고도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배우고 싶은 게 많다. 학생이란 신분을 쓰지 않았다 해도 내가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고 알던 내용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건 지극히 평범한 열망이다. 다만 그때는 전적으로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지금은- 필요에 의해서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이 끌리는 무언가를 성취하는 게 그저 좋다.
하지만 난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대학을 가지 않기로- 최소한 보편적인 방향에 따라 스무 살에 대학생이 되는 길을 걷지 않은 건 수천만 원의 등록금과 그에 수반되는 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못되어서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매우 소모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했으니까.
고등학교 내내 악을 써서 내신을 쌓고 들어간 과가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하고, 졸업 후의 미래가 불분명하다면? 열여섯의 나는 그런 가정 자체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학력과 학벌 등의, 노골적이거나 자연스러운 형태의 차별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대학생인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건 대학생 대상의 교내외 프로그램, 다양한 강의에 참여하는 걸 볼 때다.
물론 등록금을 내도 정원이 차 엉뚱한 시간대에 원하지 않는 수업을 듣는 경우가 허다하고 자질이 부족한 교수가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난 최소한의 기회를 가지고 싶었다.
대한민국의 제도권을 벗어나면 어쭙잖은 형편으로는 여러 기업체에서 운영하는 화려한 교육을 맛보기란 쉽지 않다. 대학생 대상의 공모전, 교환학생 등은 일단 도전할 자격부터 안 되고, 외부에서 운영하는 사설 프로그램으로 눈을 돌리면 플랫폼 자체가 공유되지 않거나 홍보가 부족했다.
비용이 저렴하면 수강인원이 적어 금세 마감되기 일쑤였고, 애초에 지방에서 오프라인으로 열리는 강좌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정성이 있으면 요즘 세상에 인터넷으로 다 들으면 된다’라고 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양질의 수업이 정보화 시대에 어울리게 각종 동영상이 정보의 바다에 올라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면대면으로 강사와 소통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과 일방적인 영상을 따라가는 게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개인의 사정이나 취향에 의한, 선호도에 따른 ‘선택’의 여지가 누군가에게 없다는 건 그 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대학을 들어가지 않았고, 최종 학력이 고졸인 상태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 배우고 싶은 것들에 조금씩 손을 대고 있다.
많은 사람은 학벌로 차별을 두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만큼 많은 사람은 고졸과 대졸이 같다는 건 어불성설인 데다 대졸에 대한 역차별이라 믿으며, 별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수준이 고졸만도 못하다’, ‘고졸인데 뭘 바라냐’ 따위의 문장을 생각 없이 구사한다. 설령 그 말을 농담조로 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대학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씌워지는 프레임을 경험한 적도 없는 사람들의 ‘농담’은 무례함을 전시하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요새 볼 수 있는 여러 자기계발서, 블로그 등에는 퇴사를 하고 제2의, 자신의 적성과 적합한 일을 찾아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종종 보인다. 나 역시 회사를 그만두기 전 그런 책들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은 망하는 유가 아니며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대한민국에서 ‘명문’으로 인식되는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의 뒷받침을 받거나 대학이나 직장에서 무언가를 증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에겐 공허하게 들렸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고뇌 끝에 인생의 어떤 기점에 선택을 한 것이었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 없어서 겁이 났다. 그럴듯한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그럴싸한 경력을 쌓아두지도 않은 채 회사를 그만둔, 무엇하나 증명하지 않은 스물둘.
흔히 고졸이라면 집에 돈이 없거나, 머리가 지지리도 나쁘다고 일반화한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뭐 대학을 다니거나 나온 사람들은 전부 가정환경이 풍요롭고 두뇌가 뛰어난가? 인간은 결국 누군가에게 분류되기 마련이고, ‘고졸이라서’라는 색안경을 쓰는 이유는 그게 편하고 익숙해서이다. 누군가를 더 알아갈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제멋대로 정의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
그리고 설령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거나 경제 사정이 여유롭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 재단 당하고 깎아내려지는 게 자연스러운가? 온당한가? 그게 지극히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사회 맥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인생에서 1초도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유형은 지겹게 보아왔고 더 이상 귀중한 삶을 불쾌한 인간들로 채우고 싶지 않다.
나는 배우고 싶게 많고, 그게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흔히 말하는 ‘제도권의 교육’을 벗어나더라도 공평하게 접근할 수 있길 바란다. 물론 재력에 따른 차등을 완전히 없어지길 기대하진 않는다. 그건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무너진 후에나 상상해볼 법하니까.
지방에 사는 고졸도 합리적인 가격에 믿음직스러운 수업을 듣고 싶다. 열정이 있으면 온라인 강좌나 알아보고 서울로 올라와서라도 참석하라는 ‘노오력’ 따위의 말은 사양이다.
처절하게 애쓰지 않아도 당연하게 원하는 수업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