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설탕공예 같은 신부, 행복한 신랑
얼마 전 친한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회사에서 만났지만 가치관이 비슷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어서 퇴사 후에도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나와 내 주위의 친구들은 대부분 비혼주의자이며 아직은 ‘결혼을 안 한다’라고 선언할 필요도 없는, 압박을 받지 않는 나이기도 했다. 내가 더 나이가 들어 ‘왜’라는 딱지를 달고 홀로 살지 인생의 일정 부분을 같이 견뎌낼 사람을 만나 제도적으로 함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결혼이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어렸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결혼식에 갔을 때, 친척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고 뷔페의 메뉴를 눈 돌아가게 살피느라 바빴다. 아득한 샹들리에나 결벽 적으로 새하얀 신부의 드레스는 마냥 화려하고 예뻐 보였고 주례사는 과하게 길다고 생각할뿐이었다.
피부 잡티 하나, 얼굴과 팔뚝에 한 줌의 지방도 허용하지 않으리란 모습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신부와 달리 신랑은 민낯이나 다름없는 얼굴에 새까만 뿔테 안경까지 끼고 하객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모든 결혼식장은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슬픈 건 그때부터 십 년은 더 지났어도 변한 건 없다는 거다. 예식 시간이 지나치게 붙어 있어 주례사가 좀 짧아진 것 외에는 말이다.
바뀐 거라곤 내 생각 뿐이었다.
‘결혼’이라는 유구한 제도 자체에 관해 내가 명확하게 정의를 다시 세우거나 조목조목 따지며 해체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그만한 소양과 양식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그저 한 사람으로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결혼식을 몇 번 보아온 사람으로서 내가 느꼈던 이질감을 정리하려 한다.
언급했지만, 나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서로의 법적 보호자이자 동거인으로, 제도적으로 묶이고자 결정하는 이유를 모르지만, 미디어에서 포장하는 ‘축복뿐인 사랑’일 수도 있지만 대다수가 그 뿐만은 아니라는 건 안다. 사랑, 의무감, 부채감…….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복잡한 감정의 결과 무게를 나누는 게 아니다. 두 사람에게서 일어난 상호작용을 철저히 제삼자인 내가 얹을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까. 내가 보는 건 결혼이 아닌 결혼식이니까.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는 웨딩 촬영과 결혼식을 디데이로 설정하고 혹독하게 살을 빼고는 한다. 사회적 시선에 맞추기 위해서든 어쨌든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핏을 얻기 위해 몸의 부피를 줄인다.
드레스, 옷이라기보다는 조형물에 가까운 웨딩드레스는 대개 흰색이다. 다른 색들도 있다고는 하나 내가 본 결혼식은 새하얗고 화려한 웨딩드레스와 까맣고 평범한 정장이었다. 신랑은 큰 보폭으로 먼저 걸어간다. 신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간다. 공예품에 가까운 가늘고 긴 굽이 달린 폭이 좁은 구두를 신은 채, 스텝이 잡아주어야 걸을 수 있는 긴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가 없거나 참석할 상황이 아니라면 다른 남자 친척의 손을 빌려서라도 그 길을 걸어야 한다. 한 걸음을 내디딜 대마다 스텝이 드레스 뒷자락을 정리한다.
크고 웅장한 신랑의 행진곡과 달리 신부는 느리고 잔잔한 음악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물론 위태로운 구두와 천이 겹겹이 싸인 드레스로 성큼성큼 가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기는 하지만.
사회자는 말한다. ‘오늘 가장 행복한 남자인 신랑과 오늘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 신부’라고.
네?
신부의 손은 아버지에게서 신랑으로 넘겨진다. 여성은 남성에서 다른 남성에게 넘어간다. 신랑은 가장 행복할 테지만 신부는 그저 아름답다고 한다. 행복은 감정이자 상태이지만 ‘아름답다’는 결국 보이는 모습이지 않은가. 물론 ‘내면이 아름답다’ 따위로 쓰일 수도 있지만 결단코 그런 맥락은 아닌 것 같다. 그 정도의 배려심이 있는 사회자였다면 그런 문장 자체를 쓰지도 않았겠지.
남성은 행복하고, 여성은 아름답고? 물론 이 문구가 관용구처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처럼 결혼식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굳어진 말이란 걸 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쉽고 단순하게 쓰는 말들 있지 않은가. 어쩌면 진심으로 이 문구가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일 수도 있다. 아마 그렇겠지. 축복받아 마땅한 두 사람이 법적으로 맺어진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그 문장이 좋다고 여기고 썼을 수도 있지.
하지만, 몸을 한 번 트는데도 다른 사람이 도와줘야 하는 드레스를 입고 사뿐사뿐하게 걸으며 우아하게 웃어야 하는 사람과 납작한 구두에 바지 차림인 사람의 시작은 공평할까? 그 아무것도 아닌 편평한 말이 형태를 띠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객들은 신부에게 너무 예쁘다고, 엄청 날씬해졌다고 호들갑을 떤다. 대부분의 사람이 드레스에 몸을 맞추는 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하객들과 스스로 채찍질하며 살을 빼는 신부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상황 자체가, 몸에 맞는 옷이 아닌 옷에 맞는 몸을 만드는 게 아주 흔한 관습처럼 되어버린 게 당황스럽다.
‘그걸 원했다’, ‘자기만족이다’, ‘이게 당연한 거다’- 등의 한 개인의 의사가 문제가 아니라 난 그 상황이, 환경이, 기저에 깔린 인식이 기묘하게 여겨졌다.
나와 내 친구들이 바지가 한 치수 늘어날 때마다 기겁을 하고 기성복 사이즈가 점점 줄어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다이어트를 결심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사이즈를 늘려서 입거나 똑같은 사이즈에 제각각인 크기에 의문을 품지 않고 내 몸을 미워했던 시간처럼.
나는 정형화되고 아주 평범한 결혼식 자체가 축가로 지킬앤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부른 후 지킬이 하이드가 된 후 ×된다)이나 프랑켄슈타인의 ‘너의 꿈속에서’(끝나면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린다)가 들린 것보다 훨씬 떨떠름하다.
내가 모르는 심오한 뜻이 있는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