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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May 17. 2019

보이는 몸, 보이지 않는 몸_(1)

신체를 조각내는 행위, 조각하는 행위

  

허벅지를 반듯하게 오려내는 상상을 종종 했었다. 절취선에 맞춰 뜯는 과자봉지처럼 앉을 때 퍼지는 허벅지 살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나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주위 친구들과 다이어트를 흔한 화제로 올렸고 ‘입 다이어터’라며 스스로 자조적으로 칭하기도 했다. 

나는 쭉 저체중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BMI 기준으로 정상 체중으로 몸무게가 늘었는데, 근육과 지방의 비율이야 모르겠지만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저체중이었던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목표 체중을 설정하며 체중을 감량하길 원했다.


43킬로그램, 45, 48, 50- 수치는 계속 올라갔고 나는 마지노선으로 50킬로그램을 설정했다. 아마 이삼 년 전까지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살을 빼고 싶지는 않고 근육량이나 늘기를 바라지만.


나는 왜 살을 빼고자 했을까? 나는 운이 좋게도 누군가 내 몸을 두고 왈가왈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물론 대한민국 평범한 가정답게 엄마가 ‘허벅지가 튼실하네’라고 말하거나 동생이 ‘언니처럼 살이 찌면 어떡해’라고 한 적은 있었지만 상습적으로 ‘너 그렇게 먹어서 어떡할래’ 따위의 되먹지도 않은 참견을 듣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돌이켜 봐도 잘 모르겠다. 아마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살을 빼려고 했던 것이다. 여자의 인생에 다이어트는 끝없는 숙제이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춰진 몸매를 가꾸는 것이 미덕이자 성실성의 척도처럼 여겨졌다. 미디어의 여성 연예인은 50킬로그램만 넘으면 ‘후덕하다’는 단어를 사용하며 ‘털털하다’는, ‘여성으로 매력이 없다’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어휘를 붙인다. 


물론 나는 진지하게 살을 뺀 적이 없다. 엄격하게 식단 관리를 하거나 무리하게 운동을 해서 몸의 내구도가 망가져 병원을 찾지 않았다. 지독하게 운동을 싫어해서 기초 체력을 쓰레기로 두긴 했지만.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많은 여성은 진지하건 습관이던 ‘체중 감량’을 인생 숙원으로 삼은 양 다이어트 정보를 공유하고 ‘결국 또’ 먹은 자신에게 나태와 의지박약이란 틀을 씌운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는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실천 여부를 떠나 생애 과업처럼 여성에게 달라붙어 있다는 거다. 아주 끈끈하고 자연스럽게.




옷 사이즈는 점점 줄어드는데 가게마다 표준이 된 치수도 아니어서 인터넷 쇼핑몰의 경우 번번이 상세 치수를 확인해야 하고 오프라인에서는 옷을 대봐야 한다. 내 몸은 하나인데 사이즈는 다르니 바지를 27로 사야 할까 29로 사야 할까, M일까 L일까- 오프라인이어도 옷마다 달라서 계속 바꿔 입기 번거롭고 온라인이면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사진 후기를 꼼꼼히 보면서 내 체형과 비슷한 사람이 올린 후기를 찾아 헤맨다.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최근에 남성 의류로 넘어가거나 남성복과 동일한 방식으로 제작한 여성복 쇼핑몰이 늘어난 점이 좋긴 하지만, 애초에 옷을 성별에 따라 구분하는 것도 넌센스다. 같은 가격인데 성별에 따라 티셔츠의 재질이 다르고 바지 주머니 깊이가 다르다니, 여성용 팬티에 달린 의문의 리본만큼 어이가 없었다.      


옷이 줄어든 만큼 몸피를 줄여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일단 내가 그랬다. 진짜 옷이, 같은 M 사이즈가 2년 전과 지금을 다르게 만들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하고. 그저 내 몸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문을 가지고서.



지난 한 달간 간헐적으로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면 식은땀이 나고 명치와 위장이 울렁거리면서 등 뒤부터 찌르르 더워진다. 심할 때면 토하고 기절할 것 같다가도 몇 분 뒤에 파도가 그친 것처럼 잠잠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괜찮아진 거 같기도 하다.


벌써 이 문제로 네 번은 조퇴를 했었고 결국 안 그래도 짧은 알바 시간이 더 단축되었다. 몸이 괜찮아지면 다시 원래 시간대로 하라고 배려를 받은 거며 그에 관해 감사하고 있지만 스스로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머리에선 아르바이트를 그만뒀을 때 변화할 생활 패턴과 지금 반드시 나가야 할 지출, 시간을 줄이면서 받을 시급을 끊임없이 머리에서 잰다. 돈이고 뭐고 확실하게 조져지기 전에 푹 쉰 다음에 훗날을 생각할까 하면서도 지금 한창 받고 있는 수업과 핸드폰 요금이 내 발목을 잡는다.     


건강할 때는 건강하지 않은 나를 상상하지 않는다. 건강한 몸, 멀쩡하게, 아픈 곳 없이 굴러가는 몸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한 달 내내 탈이 나 비실비실거리는 지금이 예외이다. 하지만 이게 기본값이 된다면? 


여성의 몸은 자주 대상화되지만 진정한 몸은 크게 중요시하게 다루지 않는다. 식이장애를 겪고 마른 몸이 되어도 ‘그래도 예쁘네’ 처럼 외양을 칭찬하거나 급격한 체중 변화로 피부가 뒤집어지고 없던 병이 생겨도 ‘그래도 날씬하니까’라며 일축한다. 여성의 몸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일주일간 든든한 밥을 못 먹고 있어서 아마 내 몸은 줄어들었을 거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으며 식사량이 준 게 반갑지도 않다. 아파서 살이 빠졌을 때 ‘개이득’이라며 좋아한 친구가 있었다. 그때는 나도 심드렁하게 그건 잘됐네, 라고 대꾸한 적도 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었고,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었었다. 


학교에서는 취업에 필요한 메이크업 특강은 초빙해도 내 몸을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의 질을 꾸리며 살아갈 수 있는지, 건강하지 않은 몸이라도 어떻게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

무조건 직접 부딪혀가며 하나하나 익히기에는 나는 너무 겁이 많고 그전에 지칠까봐 다시 겁이 난다. 


나에겐 보이는 몸을 어떻게 가꿔야할 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몸을 어떻게 아껴야할 지가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그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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