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낙태여행, 낙태죄 헌법불합치- 그리고
한해의 절반이 지나갈 무렵 고등학교 동창 다섯이 모였다. 만들래? 해볼까? 하다 정말 만들어진 페미니즘 독서 모임. 4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났고, 한명의 제안으로 자연스럽게 봄알람에서 출판한 [유럽낙태여행]을 모임 첫 책으로 골랐다.
텀블벅에서 ‘세탁소의 여자들’을 펀딩했을 때 샀던 터라 진작 읽었던 책이었지만 간만에 정독한 책은 현재 화두에 오른 낙태죄를 둔 여러 관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새롭게 알아가기에 굉장히 알맞았다. ‘낙태죄’에 관한 유럽 여러 국가의 현재 주소와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관점이 나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져줌으로써 나의 시야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모임에 참여하기 전 책을 읽은 후 나의 의견과 어렸을 때 당연하게 학습되었던 잘못된 정보를 정리하며 어떤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했다.
낙태란 무엇인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편협한 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소리 없는 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교육할 시간에 낙태 기구를 피하기 위해 태아가(태아인지 배아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도망치는 듯한 모습을 담은 영상 말이다. 그게 1984년에 낙태 반대를 위해 제작된 영화인 것은 들었는가?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 영상이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이라고 믿어왔다. 다른 이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공교육을 철저히 신뢰해왔다. 국가가 공인한 교육안이 잘못되었을 거란 가정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낙태죄, 형법 269조. 대한민국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인공임신중절을 한 여성과 의료인에게 법적인 처벌을 내렸다. 형법이란 어떠한 행위가 범죄로 처벌되고, 그 처분의 정도·종류를 규정한 법규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내린 선택에 죄를 묻는다니, 시대착오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이쯤 되면 여성의 재생산권과 자기결정권에 국가가 관여하려 드는 것부터 소송을 걸어야 할 지경이다.
국가가 살피는 생명에는 여성이 없다. 노키즈존을 ‘힙한 풍류’ 내지는 ‘맘충만 아니면’으로 합당하다 여기는 곳에 아동은 없다. 아동과 여성은 배제된 국가에서 생명은 오로지 포궁에 착상된 손가락 마디만 한 세포뿐이며 그 인식에 공공장소에서 임산부를 향한 배려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예전에도 세뇌와 주입의 산물로 태아가 ‘소중한 생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불법임을 감수하고 임신중단을 결정해야 하는 여성에만 초점을 맞춘 채 빠져나간 남성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정확히는 부재(不在)에. 임신의 위험과 낙태의 부작용- 혹시나 출산을 해야 할까, 에서 파생되는 수만 가지 고민과 그것보다 훨씬 위협적이고 직접적인 외부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로지 여성의 몫이다.
콘돔을 끼기 싫어서 질외사정을 잘 하겠다며 징징거리는 놈이나 콘돔 꼈으면 된 거 아니냐며 책임을 회피하는 놈이나 똑같이 타는 쓰레기지만 남성의 섹스를 일종의 스펙으로 치환하고 여성의 섹스를 재화의 손실로 취급하는 이중 잣대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이 모든 문제가 특정 개인의 잘못이라 말하기에는 얄팍해진다.
‘유럽낙태여행’에서는 한국의 페미니스트 네 명이 유럽의 여성들이 여성의 자기몸결정권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기 위해(남성은 당연하게 보호받는 권리 때문에 투쟁해야 하는 것 자체가 슬프지만) 노력했던 역사와 현재를 짚고 미래를 구상해간다.
유럽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막연한 유토피아는 없었다. 합법화가 된 네덜란드와 프랑스조차 대중의(심지어 의료인조차도) 인식, 법으로 보장되는 주기, 접근 방식 등 때문에 다른 국가로 가는 경우가 있었다.
영국은 24주 전까지 인공임신중절을 받을 수 있으며 95% 이상 NHS(영국의 국민의료서비스)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영국 또한 반(反)낙태를 주장하는 무리와 싸워야 하며 의사의 허락 하에 24주 안에 이루어져야 하며 몇몇 경우와 여성의 ‘정신적 한계’를 증명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의사가 수술을 거부할 수도 있다.
네덜란드도 영국도 완벽한 모델도 여성이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꿈의 나라도 아니다.
2019년 4월 11일 형법 제269조 제1항 등이 위헌소원으로 헌법불합치가 결정되었다. 2020년 개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낙태죄는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다.
새롭게 바뀔 법이 단순히 낙태죄란 항목을 없애는 것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보장하며 안전한 환경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환상의 나라는 없고 환장할 현실만 있지만 우리의 몸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 법을 재정립해야 할까?
‘발제문’을 써보겠다고 시작한 글이었지만 나조차도 내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호할 뿐이었다. 내가 그동안 품어왔던 실타래를 풀어놓았다는 데 의의를 두면서도 2020년에 법이 개정되면서 어떤 요소가 들어가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는지는 처음부터 물음표로 남아있었다.
책과 영상(닷페이스 제작 ‘세탁소의 여자들’)에 관한 소감을 간단하게 말하며 모임은 시작되었다. 우리를 충격에 빠트린 건-굉장히 많았지만- ‘피임권’이라는 말 자체였다. 피임이 법적으로 금지했다니, 국가가 가족계획 또는 인구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의 몸을 출산 기계로 취급하겠다는 게 이만큼이나 노골적인 일이란 말인가. 여성의 신체를 철저히 도구화하고 그 사실을 감추거나 우회할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끔찍한 일이었다.
또한 사문화된 인공임신중절을 법적으로 제재하고 여성과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 역시 말 그대로 ‘위선’임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중한 생명권을 이유로 들면서 여성의 죽음은 방조하다니, 그저 여성의 죽음에 무관심하다는 말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미프진을 상용화한 게 20세기의 일인데 한국에 산 우리는 오랜 시간 인공임신중절은 무조건 수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발전한 기술을 누리지 못하고 소파술 따위의 구시대적이고 위험한 방식이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거다. 애초에 불법이므로 체계적으로 교육‧실습 될 여지도 없다 느껴진다.
나는 발전한 기술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자본이 개입해서 필요한 이들이 접근하기 쉽게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 기술은 점차 정체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우리는 더 안전하고 편리한 환경에서 여성이 걱정하지도 불쾌함을 겪지도 않고 인공임신중절-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료행위를 받을 수 있길 바란다.
유토피아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한국 여성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막연하게 ‘유럽은 낫겠지’하는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정된 낙태 클리닉에서만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하다는 걸 얘기하며 나는 한국에서 법이 재정립될 때 각 여성병원 의료진들이 정해진 교육을 수료한 후 인증을 받으면 인공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하게 하면 어떨지 얘기했다.
그러자 그러면 법 개정이 되고 인증되는 사이의 기간까지는 어떻게 하느냐는 의문이 나왔다. 현재 인공임신중절의 방식을 의료계에서 얼마만큼 교육‧실습을 받고 현장에서 접근하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화제는 금세 전환되었다.
종교적인 이유를 들며 ‘하늘이 내려준 생명을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남성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따져 묻고 싶다. 논지를 벗어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섹스를 하고 책임을 안 지겠다는 거냐’와 임신을 ‘선한 징벌’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여성의 존재는 어디로 갔으며 남성의 책임은 왜 구하지 않는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졌다. 사실 진심으로 알고 싶지는 않다. 그냥 헛소리할 거면 입이나 다물었으면 좋겠다.
동일한 사안도 의료인으로, 여성권 활동가로서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며 하나로 연대한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여성의 인공임신중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다르지만 결국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죄책감을 강요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선배 페미니스트들의 현재 좌표는 우리에게 단단한 힘과 용기를 주었다.
인공임신중절을 의료행위로 연결하지 않는 이들에게 분노하다 ‘남자들이 화를 낸다면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란 구절에 박수를 치면서 우리는 재생산권을 다음 주제로 올렸다.
재생산권,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도 정의하지 않은 단어이자 새롭게 출몰한 권리로 ‘재생산권’을 어디까지 포함할 것인지는 아직까지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 어떤 이가 발화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재생산권, 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는 여성이 자신의 임신과 출산을 국가 등 제삼자의 개입을 받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 정도로 인지했다. 실제로 재생산권과 관련된 이슈는 무수히 많았으며 보건의료적 관점이나 젠더까지 포괄적으로 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생산권의 의미를 확실하게 정립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견이라고 말하기엔 모호하나 우선 좁게 여성의 임신-출산의 결정부터 안전하게 보장된 이후에 보건의료적 관점이나 젠더로 논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칫 의미를 확장해서 보다 보면 기존의 논지가 흐려질까 우려되었으며, 한 친구는 확장된 재생산권의 의미를 논의하려 하면 대체할만한, 포괄적인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재생산권- 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직관적인 의미가 너무 넓어지면 오히려 대중의 인식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법이 재정립될 때 어떤 내용이 보장되어야 할까? 우리는 의료 보험 적용, 기업체의 휴가 보장, 그리고 임신중절 약물이 편의점 또는 약국에서도 판매 허용되어 접근성을 강화하고 대중적으로 이용되기를 희망하며 첫 번째 모임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