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겪은 꾸밈의 기원
우리는 여성이기에 부과하는 무수한 요구를 수행하거나 무시하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취급되는 것은 더 많고 꼼꼼하고 숨 막히는 규범을 지고 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번에는 책에 관한 이야기보다 각자가 겪고 보아 온 사례를 공유하며 탈코르셋이란 정확히 무엇이라 해야 하는지, ‘주체적 꾸밈’이 가능한지, 주위에서 들은 외모 압박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등을 두서없이 떠들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사회가 크게 비난하지 않는 외관으로 태어났으니까. 평균의 키와 몸무게, 모나지 않은 얼굴. 나를 아는 사람 중에 내 외형을 강박적으로 꾸짖고 폄훼하는 이도 없었고 그런 덕분에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시간과 돈을 할애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내 몸무게를 포착하고 ‘몇 킬로그램’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취업을 하면 자연스럽게 화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귀찮아하는 성정 덕분에 아침에 화장을 하고 밤에 화장을 지우느라 잠을 줄이거나 다이어트 보조제에 카드를 긁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살을 빼야 한다고 말을 하곤 했으며 가끔 예쁜 색감의 아이셰도우와 립스틱을 주문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내가 자신에게 강박적으로 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는 외관이어서다. ‘살 좀 빼면 훨씬 예쁠 텐데’ 라던가 ‘여기만 고치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자주 듣지 않을 만큼의, 딱 그 정도의. 물론 훨씬 많은 여성이 매스 미디어에 맞춰 숨 쉴 틈 없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고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주위의 끝없는 압박을 받아 자신을 재단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난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나에게 집요하게 외모나 몸매를 지적하는 친구나 가족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학교에 가다가 다른 학교의 남학생 무리에게 ‘쟤 다리 좀 봐’라는 조롱을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운이 좋은 편인가?
분명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훨씬 엄정하고 냉혹한 잣대에 맞춰 살을 잘라내고 그 안에 보형물을 넣거나 지방과 피를 빼고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풀메이크업을 하거나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올리고 다니는 일은 너무 흔하게 일어난다. ‘여자애가 그게 뭐냐’라는 말이 한두 차례의 흘김이 아니라 지독하게 반복적으로 겪는 폭력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인가. 엄마는 장난식으로 내 허벅지를 보고 놀라는 시늉을 하곤 했지만 아주 드물었고 가까운 친구들 대부분은 타인과 자신의 겉모습에 무관심하며 나는 타인의 지적에 아네뭐네하며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으니까?
그러면 왜 화장을 하지 않느냐고 천진하게 물었던 질문과 입술이 너무 하얗다며 립글로즈를 내 입술에 문지르던 일과 점점 줄어드는 여성의 표준 옷 사이즈는 완벽한 타인의 것이 되는가?
적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일상은 이런 것들과 정면으로, 혹은 교묘하게 맞서야 하는 일의 연속일 것이다. 나는 최대한 나의 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고 노력하지만 만약 노화하거나 체중이 10킬로그램씩 늘거나 건강하지 않은 나 역시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그때의 나도 나는 계속 노력해야겠지. 나를 그저 나로 받아들이기 위한 연습을 하며.
- 책을 읽고 씀, '몸의 초상'
인터넷 쇼핑몰, 인스타그램 광고 등을 캡처하여 어떤 식으로 여성에게 정형화된 미를 강조하고 성적 물화하는지 살펴보았다. 온라인 쇼핑몰의 77-88 사이즈 옷을 모아둔 카테고리의 피팅모델은 스몰 사이즈의 30인치가 한참 안 되었다. SNS 피드를 훑기만 해도 기업체 광고에 맥락 없이 여성의 몸만 부각해서 글자만 삽입된 이미지는 흔했으며 유아동복 모델이 성인 여성에게 강요되어 왔던 핑크톤 화장을 한 채 ‘인형 같은’ 표정과 다소곳한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이 몸의 기능이 아닌 외형에 집중하게 하며 꼭 필요한 근육을 제거해야만 ‘부드러운 곡선’이 완성된다는 허상을 주입하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뷰티 산업은 어디까지 우리를 옭아매어 왔는가. 특히 미디어에서 생산하고 확장하는 ‘미’는 우리를 어떤 식으로 만드는가.
나는 운이 좋게도 외형의 압박을 엄청나게 받지 않고 자라날 수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달랐다. 그건 교묘한 형태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무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한 친구는 ‘여자 청소년에게 권장되는 건전한 놀이가 외모를 가꾸는 행위’로 한정되어왔으며 과체중인 몸은 선택이 제한되는 게 자연스러운 환경이 된 청소년기와 바뀌지 않은 현재를 비판했다. 또한 ‘허벅지가 맞으면 허리가 안 맞고 허리가 맞으면 길이가 너무 긴’, 여성복으로 팔리는 의류가 ‘여성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크기가 작아지고 있으며 라지, 투엑스라지의 옷들조차 ‘키 크고 마른 여성을 본으로 만든’ 것임을 지적했다.
우리 모두 체형이 바뀌지 않은 시기에도 옷 사이즈는 점점 크게 골라야 했던 경험이 있었다. 광고는 대체로 팔다리가 가늘고 피부가 매끄러운 여성의 몸을 전시하며 섹슈얼한 이미지를 생산‧유포한다. 외국인 모델을 기용할 경우 전부 마른 백인이며 여성의 옷 사이즈는 지독하게 제멋대로이다.
이런 환경에 저항하여(저마다의 계기나 목적은 다를 수 있으나) ‘탈코르셋’을 시도하는 여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모임에 참여한 이들도 화장을 줄이거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거나 몸에 편한 옷을 입으며 하나씩 강제된 꾸밈이 아닌 진짜 자신에게 좋은 것을 고르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화장품과 옷을 샀던 돈으로 책, 운동 수강료 등 자기 계발을 하며 우리는 점점 자신만의 다양함을 발견하고 있었다. 탈코르셋을 페미니즘 운동으로써 해야 한다는 의견도, 꾸밈 노동이 요구되는 연령이 점점 어려지는 현상을 보며 후세대 아동을 위해서라도 하나씩 정형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리는 외모만이 아닌 다른 자기 계발 등에 시간과 비용을 들여 ‘다양한 모습’을 확장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재 사회에서 주체적 / 꾸밈이 성립할 수 있는 단어인가, 백 퍼센트 오롯한 자신만의 의지에 따른 꾸밈이 가능한 사회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를 지배했다. 그런 세상을 우리는 바라고 있지만 아직 그러지 못했으며 현재 시점에서 한 여성의 꾸밈에서 사회적 요인과 개인의 의지가 몇 대 몇의 비율인지 구분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며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만 나아갈 뿐이며 외형에 한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확장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