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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Jul 07. 2019

우리에겐 독서가 필요하다_3회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 부재 된 누군가의 목소리

                    


책을 다 읽은 후 고민을 많이 했다. 앞선 두 모임의 큰 갈래는 낙태죄와 탈코르셋/여성의 몸으로 나의 이야기였고 나의 경험이었고 내가 머리끝까지 담긴 세계를 공유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사회에서 이분법적으로 요구하는 젠더롤- 여성의 역할에 질문하며 ‘바람직한 여성상’을 저항하는 유 외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별 위화감이 무엇인지 깊게 공부하거나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온 다섯이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책을 골라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 것은, 적어도 나는 최근 ‘트랜스 ××’라는 단어가 ‘밈화’되어 공중파 방송에 나오는 현실이 경악스러웠고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는 함께 갈 수 없다’, ‘네 권리는 네가 챙겨라’는 식의 주장을 접했을 때 심란하면서도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문장으로 풀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번 책은 SNS의 추천 도서 목록 중 골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 책으로 접하기에 괜찮은 책은 아니었다. 관련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을 독자로 설정한 것 같지도 않았고 ‘사회주의’와 ‘계급’을 붙여서 지금의 차별과 혐오를 서술하는 내용은 우리가 기대한 내용은 아니었다. 사회주의라니, 마르크스주의라니, 애초에 그런 이념 등을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배계급과 트랜스젠더 혐오의 관계를 주되게 열거하는 식이었으므로 어쩌면 조금 더 개인적인 역사가 궁금했던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심화하며 성 역할이 고착화 되었고, ‘여성 산업’이라 불리는 것들이 어떻게 교모하고 자연스럽게 수익을 창출하는지는 아주 모르지 않았지만 계급이 완전히 없어지면 혐오가 사라질까? 애초에 그게 가능한 전제인가? 단군왕검 시절로 돌아가도 제사장이 있는데, 그런 의문을 차치하고 시작된 모임은 더 많은 물음표만 남겼다.     



예전부터 트랜스 젠더를 포함한 모든 성소수자에 대한 나의 시각은 굳이 생각해야 하느냐, 였다. 내가 헤테로인지 에이섹슈얼인지 바이인지 모르는 퀘스쳐너리로 남겨둔 지금이 아니었던 시절에도 그런 사람이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굳이 그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무심한 사고라는 생각도 들지만 시스젠더로 살아온 내가 ‘트랜스젠더’가 ---- 하다, 며 사견을 붙일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비슷했지만 오히려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 갈래가 다르게 뻗은 경우도 있었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이상은 사회적인 젠더가 해체되고 의료적인 성(sex)만 남기자는 것인데 ‘어렸을 때부터 치마를 입고 싶었고 화장을 하고 싶었고-’는 식의 말은 취향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것을 성(sex)과 성(gender)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식의 말이 가능한 것인가, 젠더가 가변적일 수도 있다면 결국 남는 것은 의료적인 성뿐인데 ‘여성/남성’의 신체로 수술하는 것은 왜 그런 것이며 비수술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현재의 몸을 바꾸고 싶지 않지만 스스로 성별 정체성을 패싱 되는 것과 다르게 지정하는 경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비수술 트랜스여성을 여성 공간 진입을 허용할 수 있는가? 앞선 말들은 내가, 시스젠더가 판단하고 시스젠더를 설득할 문제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질문에서는 나는 슬프게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젠더가 해체된 세상, 최소한 여성이 성적 물화되지 않고 대상화되지 않으며 새벽 두 시에 산책을 할 수 있고 불법 촬영물이 인터넷에 유포되지 않는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면 나는 남성으로 패싱 되는 비수술 트랜스여성이 화장실이나 대중목욕탕 등에 들어온다면 그 공간을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여대 내 남성이 ‘여장’을 하고 침입했던 일이 최근이었다. 이건 트랜스젠더의 잘못-애초에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잘잘못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이 아니라 ‘일부’ 남성들이, 유구한 여성 혐오와 여성 범죄가 끊이지 않는 현실이, 그 가해자들의 문제라는 걸 알지만 여성으로 패싱 된 순간 노출되는 범죄의 가능성이 너무나도 뿌리 깊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내 머릿속에 얽힌 의문들을 긁어내며 이 의문 자체가 당연한 듯하면서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시스젠더끼리 트랜스젠더가 말하는 게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이며, 따위를 추론하고 짐작해봤자 말끔하게 정리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지하고 얄팍한 사념에만 갇혀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소수자에게 폭력이 될 게 분명했다. 나는 그 순간이 무서웠다.


잠깐,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지? 뭘 할 수 있지?



나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우리가 시스젠더 여성임을 증명하라는 요구와 맞닥뜨린 적이 없다. 사회의 여성적 규범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거나 내가 여성임을 사회가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순간 그 규범을 다르거나 그렇지 않거나 의심받으며 ‘증명’을 요구받는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정신질환의 일종이라는 무례함에도 시달린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SNS 속에서는 그런 혐오들이 꾸준히 올라온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어떤 주장에 관해 논리적으로 내 의견을 피력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내 목소리를 낼 때인가?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는 아닌가? 내 일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것도 내 무지를 정리하지 않고 뱉어내는 것도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일단 지금은 더 들어야 할 때이다. 적어도 나는, 어쨌든 나는.  





다양한 젠더와 관련된 컨텐츠를 알고 계시다면 추천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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