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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Aug 05. 2019

우리에겐 독서가 필요하다_5회

이상한 정상가족, 정상성의 허구와 집착


        

나는 모범생이었다. 수업 시간에 존 일이 드물었고 선생님의 설명에 경청하며 질문을 던지면 성실하게 대답했다. 교과 성적은 대체로 우수했고 여름에도 블라우스 단추 하나 풀지 않은 반듯한 차림을 유지했다. 꽤 오랜 기간 부조리한 교칙에 준수하며 살아왔다. 그런 나라도 체벌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중학생 때 체벌 금지에 반대하는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글로 도서관장 상을 받았었고.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한 학년에 학생이 백 오십 명도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싫은 아이들이 많았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자랑스럽게 일탈을 자랑하는, 한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고서는 무리를 지어 비웃는. 내가 특별히 공감 능력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괴롭힘의 대상이 나였기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들. 


반의 분위기를 흐리고 수업을 방해하던 이들을 보며, 그리고 그들을 무력하게 방관하는 교사들을 보며 체벌이 확실한 제제가 되리라 믿었다. 왜냐하면 손찌검하는 교사 앞에서 그들은 방자하게 굴지 않았으니까. 

돌이켜 보면 그 환경 자체가 굉장히 섬뜩했다. 엎드려뻗쳐를 시킨 다음 손목시계를 풀고 발로 걷어차거나 두꺼운 과학 교과서를 학생을 향해 던지거나 하는 일들이 드문드문 생각했다. 나는 그때 ‘맞을 만 하다’고 여겼다. 개인적인 앙심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렇게라도 수업 분위기가 유지되는 게 나았으니까. 


교사가 학생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일에 당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 물리적 폭력이 아닌 처벌에는 어디까지가 ‘교육’인가. 무릎을 꿇고 의자를 들고 있거나 학급 전체가 지켜보는 와중에 한 명에게 면박을 주는 것, 앞뒤가 빡빡한 깜지를 몇 십 장 쓰는 것. 담배를 걸렸거나 거짓말이 걸렸거나 심기를 거스른 것. 

왁자하고 소란스럽고 제멋대로인 학생들을 확실하게 다잡을 방법이 존재는 할까, 그렇게 뭉퉁그려 해결할 수 있었을까, 체벌은 최악의 수였을까. 그때 엎드려뻗쳐 발길질을 당했던 학생들은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고 단체로 의자를 들고 있었던 날 이후 수업 분위기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체벌도 효과는 없었다.     


사랑의 매’는 성립 가능할까? 어렸을 때 한 번 맞은 적이 있다. 불교에서 참선으로 심신이 흐트러지면 정신을 깨우기 위해 사용했다던 죽비로. 험상궂은 모양새와 요란한 소리와 달리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체벌의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말버릇’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할 뿐. ‘kibun'을 거슬렀다면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긴 했다.




내가 보고 겪은 가정과 학교, 사회는 서열주의와 유사가족주의가 견고하게 얽힌 곳이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위아래가 지엄하고 ‘말대꾸’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가족이 남이냐며 개인주의적인 행동을 탓할 수 있는 환경 말이다. 순수한 의견을 내밀지 않고 침묵해야 하는 도식은 교사-학생, 상급자-하급자의 위치로도 바뀌지 않는다. 그곳이 집인지 학교인지 직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성격에 비해) 참으려 노력하지만 결국에 참지 않고 한두 마디씩 그들의 의견에 반박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나의 부족한 사회성과 예의범절을 탓하며 나를 훈계했다. 세상에, 잘못한 게 없는데 어떻게 반성을 하나요?


이렇듯 수평적이지 않은 구조에서는 약자의 사견 자체가 체제의 반동분자로 취급되기 쉽다. 내가 성년이 되어도 그 관계가 바뀌지 않는 이상 시선이 바뀔 리 없는데, 그 상대가 미성년이면 어떻겠는가. 마땅히 교화해야 하는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된다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보호자의, 교사의 체벌을 경험했던 우리들은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고 더 ‘성숙한’ 인간으로 자랐을까? 적어도 우리는 그때 맞았던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단순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당연한 체벌이 존재할까? 양육자가 피양육자를,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당위는 누가 주는 것인가. 


말대꾸를 해서, 성적이 낮아서, 왼손잡이여서. 폭력의 당위는 어떻게 선별되는가. 어떤 체벌은 훈육이고 어떤 체벌은 학대인가.      


대한민국은 ‘가족주의’를 그린 듯이 담아낸 형상이다. ‘가족이 남이냐’ -실제로 부친이 예전에 이 말을 했었다. 나 아니면 남이지, 라고 했다가(생략)-, 직장 내 안내 멘트는 ‘◇◇ 가족 여러분’으로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내가 ‘정상가족-모와 부 슬하에 자랐으며 모와 부가 건강하게 살아있으며 부가 경제활동을 담당하며 표준의 양육과 교육을 받은’의 일원일 것이라 의심치 않으며 부모의 나이와 직업을 묻는다. 아버지는 안 계시는데요, 라고 말하면 그들은 되묻는다. 


어쩌다? 언제? 어휴, 어머니 혼자 고생이 많으셨겠네…….      


아네뭐네.      




전 직장의 동료들은 좋게 말해 ‘가족적인 회사’라는 말을 했다. 가족적이다는 말은 무엇인가?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게 유해한 지금 그 표현은 허상에 불과하다. 모와 부가 살아있고 한 명 이상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면 그 집은 정상적인가?      


정상-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     


다른 가정의 형태는 탈이 있다는 건가? ‘제대로’가 아니라는 건가? 누가 무엇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들이 보기에 ‘이상이 없던’ 시절보다 ‘불완전한’ 지금이 훨씬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말 한마디에 수틀려서 화를 내거나 눈치를 보며 내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니까. 가정의 환경을 가름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가정의 구성원들뿐이다.      


게다가 사회는 당연히 피보호자의 양육과 교육을 여성 양육자에게만 맡긴다. 선의든 악의든 누군가의 태도를 판단할 때 ‘어머니가 어떻게 가르쳤으면’을 붙이는 것처럼.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듯 남성 양육자의 부재는 드러나지 않고 미디어에서는 그들의 책임을 지운다. 


노년 남성의 범죄 행위에 ‘철없다’는 표현을 쓰고 남성 양육자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헤드라인에 요약하며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럴만했다. 그러니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세상에나, 마치 20세기를 회고하는 듯한 저렴하고 저열한 문구들이라니!      


자식 교육에 목을 매는 극성스러운 엄마들은 자식을 망치는 주범으로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이에 지워진 아빠들을 묻지 않는다.-아빠, 라고 말해도 될까? 나는 항상 이 말이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서 육아에 6분 정도 할애하는 이들을 부르기를 망설이게 된다. 다른 적당한 단어가 있었으면- 유난스러운 엄마에게 시달리며 10시까지 학원에 다니고 쉬지 못하는, 수강 신청도 엄마가 대신 해줘야 하는 의존적인 세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아빠의 존재는 당연하게 생략된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다 먼지가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당연하게 엄마와 보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는 쉽게 엄마를 미워하고 쉽게 아빠를 사랑하곤 했다. 어렸을 때는 생활 전반을 함께했고 학교에 간 이후에도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엄마이니 부딪힐 일이 많은 건 당연하다. 반면 아빠는 가끔 얼굴을 비추며 별생각 없이 쉽게 편을 들어주기도 하고 선물도 사주곤 하니까.      




세상에,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렸지?


책으로 돌아오면 크게 체벌-학대, 정상가족, 가족주의, 스웨덴 등의 아동 정책으로 분류된다. 제목에서 알려주듯 정상가족이란 프레임을 꼬집으며 아동으로서, 미성년으로서 얼마나 사회의 취약한 입장이 되는지 집어준다. 


개인의 선택이 완벽히 존중되지 못하고 양육자의 결정이 우선되는. 점잖은, 조숙한, 애늙은이, 철들다- 는 말을 칭찬으로 쓰이며 ‘아이 같음’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 사회에 적응할, 구성원으로서 함께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NO'를 붙이며 부정하는 것. 우는 아이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엄마’를 비난하는 것.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나는 이 말이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와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의 생활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온전히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계급 상승을 꾀하며 죽도록 노오력하여 좋은 직업과 고소득을 쟁취하여야만 불확실한 고난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  


아니,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나 개인이 성공과 명예를 열망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런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노오력하지 않아도, 죽을 것 같이 애쓰며 몸과 정신을 갈아서 악착같이 버티지 않아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영화와 미술품을 즐길 수 있는, 죽지 않아도 되는- 



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사회적 약자가, 그 지점이 결점으로 인식되지 않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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