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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Sep 06. 2019

책, 야기_그래서 우리가 괜찮아질 순간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_은유 (2019)                   





책의 표지는 당시 김동준 씨가 사용하던 공책이다. 학교 앞 문구점의 진열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유선 공책, 한 권에 칠백 원쯤 했을 얇은 공책. 


우리는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학습하지 못한 채 사회로 보내진다. 회사, 현장, 아르바이트처- 몇 개의 단어들로 분류되긴 하지만 모두 청소년의 노동환경인 곳이며 당사자를 제외한 많은 이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청소년 노동자가?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청소년이 아니지만 여전히 같은 선 위에 있으며 아직 많은 청소년이 그곳에 있는데.     




나는 특성화고 졸업생이다.

2016년 여름 공기업의 채용형 인턴으로 합격해서 그해 겨울 정직원이 되었다. 다음 해 2월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사이 나는 두 번의 야근이 있었고 그 후로 두 달간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일정이 마비되었다.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다.


인턴일 때는 초과수당을 받지 못했지만 그 기간 야근을 당연하게 해왔던 고졸 동기들이 있었고, 열아홉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회식 자리에서 노래방까지 가며 술을 강권 받았다던 학교 선배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그건 겨우 우리에게 ‘’의 문제였다.     

      



내가 다닌 학교는 상경계열로 취업을 선택한 거의 모든 학생이 사무직으로 들어간다.(학교는 현장직, 흔히 ‘공장’의 원서를 받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진학은 철없는 선택, 중간에 학교로 돌아오는 것은 참을성 없는 짓, ‘남들은 못 가 안달인’ 회사를 그만둔 졸업생은 ‘지 복 지가 차버린’ 사람이다. 나는 정규직으로 전환된 지 2년 만에 스스로 복을 걷어찬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별일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가끔 불안하고 종종 초조하다.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다. 장래 후유증이 없는 병의 의심 소견을 받고 병원에서 한 달쯤 격리되기를 꿈꾸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누구도 내가 이런 감정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일 년만 버티면 괜찮아진다, 힘든 건 당연한 거다- 가르침에는 포기나 후퇴, 정지가 없었다. 차라리 나를 포기하는 게 깔끔하게 느껴진다.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언론의 화두에 오른 죽음은 납작하게 조명된다. 특수하고 드문 개인의 악재로 치부되고, 지나간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 말이 알 필요도 없었던 아이인 것만 같아 슬퍼졌다. 어떤 이는 몰랐고 어떤 이에게는 관행에 불과했으며 당사자에게는 폭력이자 일상이었던 하루-평범한 노동자였던 이들의 죽음을 전개한다.  알지 못하는 아이가 죽었다. 그때부터 그 아이를 알게 되었다. 시선은 당사자의 주변을 훑는다. 

본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시작된 글은 서글펐다. 


단순하게는 사무직이냐 현장직이냐부터 나누어, 노동의 종류와 직장 내 특성, 노동자의 성별 등에 따라 우리가 맞닥뜨리는 폭력의 모습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을(乙)을 좀먹는다. 나의 처신이 발랐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스스로 채찍질하거나 후배가 들어왔을 때 ‘나 때는’을 외며 가해자가 되거나.


물리적 폭력 외의 교묘한 선입견과 무례한 언행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어 넘어가기 일쑤다. 실제적인 폭력이 행사하지 않더라도 제스처, 분위기만으로도 하급자를 압박하기엔 충분하다. 문제는 이 모든 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촘촘하게 얽혀있으니 아예 인지하지 못한다. 폭력은 복합기나 의자, 모니터 같은 가구가 아니라 사무실 안에 설치한 공기청정기, 방향제 따위에 가깝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먼지보다도 가볍다. 그게 우리의 무게이며 발붙이지 못하는 차가운 한계이다. 모든 사람이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청소년 노동자, 모든 고졸 출신 노동자(이 글에서는 조직에 소속된)가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에겐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경험, 학교에서조차 배우지 못했던 한 명의 진짜 이야기.     

     




마땅히 그렇다. 

고졸 출신 직원에게 하대하는 것, ‘~씨’마저 생략된 채 이름으로만 불리는 것, 직급이 생기자 ‘그러면 어떻게 고졸 대졸을 구분하느냐’며 불만을 가진 대졸 출신 사원들(급여나 대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직원이 주임으로 바뀐 것뿐인데), 같은 기수의 고졸 사원을 ‘고등어’라고 부르는 사람, 고졸 전형으로 들어온 직원의 행실이 좋지 않으면 ‘고졸은’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는 것, 시대를 잘 타고나서 특혜를 받고 들어간 전형적인 역차별.      


선입견은 개인의 ‘관점’이 아니다. 유색의 필름을 눈앞에 두면 세상의 색이 바뀌어 보이듯 하나의 인식이 단 하나만을 비뚤게 보지 않는다.      


한 번의 손찌검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과연 단순할까? 아, 얘 때리고 싶다. 라는 생각에서 바로 손이 올라갔을까? 비윤리적인 상상을 했다고 한들 그걸 옮길 정도로 준법의식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폭력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은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닐 때 직속 상사의 머리통을 한 번, 솔직히 여러 번 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젊은 여직원들에게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한다는 상급자의 혀를 뽑아 광화문 거리에 걸어두고 싶기도 했고 업무 태도를 지적하며 ‘너 그러는 거 네 부모 욕 먹이는 짓이야’라고 말한 차장에게 ‘넌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 말 하니’라고 쏴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혀를 뽑는 등의 상해를 입히는 일은 법과 사회 통념에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내가 성희롱을 하는 상사 머리채를 쥐고 조리를 돌린다 한들 아무도 나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나는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조리를 돌렸을까. 삽소리를 하는 인간의 조리를 돌려 마땅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들의 멱살을 잡아 던져버렸을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는 여직원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임원은 승승장구해도 부당한 처우에 목소리를 높이는 약자는 불온한 존재로 무시하는 게 겨우다. 동일한 업무에도 직급이 다르니 급여가 다르다. ‘고졸’이 낮은 임금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같은 기수의 대졸 직원들과 같은 업무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마땅히 그래도 된다. 

마땅히 그러하다.



편견은 인식에서 끝나지 않는다. 무의식이든 의식적이든 그들의, 우리의 존재를 낮잡아 보고 특정한 말과 행동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물리적인 폭력의 일상화를 거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폭력과 부당한 처우, 위험한 근로조건에 노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합의와 차별이 여과되었을까. 책임자가 부재한 업무의 책임을 맡게 되고 ‘이래서 고졸은’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일 인분이 넘는(근로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은) 몫을 감수하고, 어쩌면 ‘다 이렇게 배우는 거지’라는 말에 자기합리화를 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폭력은 창조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인내와 침묵만이 미덕이라며 주입되었으며 또 다른 우리와 당신은 얼마나 많이 순종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편견이 ‘인정’되어 왔을까.      



나는 아직 이 글을 맺을 수 없다. 매듭지어지지 않은 주제이니 언제든 다시 쓰고 고쳐 써서 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세워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끝내지 못할 글을 시작한 까닭은 오로지 알리고 싶어서다. 

이곳에도 목소리가 있으며 내가 아닌 우리들이 겪어왔던 일들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여기 이렇게, 참지도 견디지도 않아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한 명이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어서. 


이런 사소하고 얄팍한 계기뿐인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이곳에 있으면서 당연하지 않은 일에 화를 내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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